이름별 문화인물

문익점 (文益漸)
1329~1398 / 고려시대의 학자, 문신
생애 및 업적
  •  문익점은 고려 충숙왕 때인 1331년 (일설에는 1329년) 晋州 江城縣 元堂里(지금의 산청군 단성면 배양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고려 중기에 이미 사족(士族)으로 성장하였지만 고려 말에는 이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살기 시작하여 이후 이 지방의 유력한 가문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 문숙선(文叔宣)은 과거에 합격했으나 관직에는 나가지 않았는데 문익점도 고향에 머물면서 한편으로는 가업인 유학을 닦고, 한편으로는 농사일도 하였다. 12살 때에는 당시의 대학자인 이곡(李穀)의 문하에서 그의 아들인 목은 이색(李穡)과 같이 공부하였다. 이곡은 당시 새롭게 일고 있었던 성리학을 닦은 신진 사대부였으니 문익점도 이 새 학문을 흡수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30세에는 정몽주등과 함께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갔다. 예문관을 거쳐 1362년 (공민왕 12년)司諫 左正言이 되었는데, 이 직책은 왕이나 조정의 정사에 대해 잘 잘못을 따져 말하는 자리였다. 따라서 목숨을 돌보지 않는 강직함과 용기가 필요한 자리였는데 문익점은 맡은 바 직책을 다 한다는 칭찬을 들었다. 이때 공민왕은 원의 간섭을 물리치고, 원의 위세에 기대어 횡포를 일삼는 무리들이나 권문세가의 횡포를 억압하는 등, 어느 정도 민족적 입장을 세우면서 잘못된 정사를 바로 잡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이러한 공민왕의 정책은 원의 불만을 사게 되었고, 급기야는 그를 왕위에서 몰아내고자 하는 움직임이 원나라 조정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사정이 급해진 공민왕은 1362년 자신의 입장을 변호해 줄 사신을 원나라에 파견하게 되었는데, 문익점도 여기에 끼게 되었다. 당시는 고려가 원에 복속되어 있었을 때이니, 비록 원나라가 쇠퇴해 가고 있는 중이긴 하였지만 그 뜻을 거슬러 자국의 왕을 옹호한다는 것은 목숨을 건 임무가 될 수밖에 없었다.


     문익점은 원나라 황제의 회유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공민왕을 왕위에서 몰아내려고 하는 음모가 잘못된 것임을 밝혔는데, 결국 원나라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중국의 남쪽 땅을 밟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면화는 마침 중국에서도 남쪽지방에서만 재배되고, 원나라 서울이었던 북경까지는 보급되지 않았었다. 문익점은 이같이 생각지도 않게 기후가 온화해서 면화재배가 먼저 보급되고 있었던 중국의 남녘땅으로 가게 되어 면화를 직접 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한 사람의 고난이 우리 민족에게는 큰 이익이 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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