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별 문화인물

일연 (一然)
1206~1289 / 고려시대의 승려, 학자
생애 및 업적
  •  1214년(고종 1) 9세에 전라도 해양(海陽:현 광주) 무량사(無量寺)에 들어가 대웅(大雄) 밑에서 학문을 닦다가 1219년 승려가 되었다. 1227년 승과(僧科)에 급제, 1237년 삼중대사(三重大師), 1246년 선사(禪師), 1259년 대선사(大禪師)가 되었다. 1261년(원종 2) 왕명으로 선월사(禪月寺) 주지가 되어 목우(牧牛)의 법을 이었다. 일연은 선사였다. 교학에도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고, 또 불교 밖의 여러 학문에 이르기까지 두루 섭렵한 대학자이기도 했다.


     그의 학문적인 관심에 대하여 비문에서는 「선의 기쁨을 누리는 여가에 대장경을 거듭 열람하였다. 제가의 장소를 깊이 연구했고, 한편으로는 유가의 책을 섭렵하였으며 백가에도 두루 통했다」고 쓰고 있다. 비문의 이 기록이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님은 백 권의 저술과 『삼국유사』에 인용된 문헌의 풍부함 등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물론 선열의 여가라는 구절에 유의할 때 그의 본령이 선에 있었던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가 학문에 등한하지 않았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를 두고 선림에서는 호랑이의 부르짖음이었고, 교해에서는 용의 소리였다고 했음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연의 학문적 태도는 엄격하고 비판적이었다. 대중을 접해 교화할 때 그 사람의 그릇에 따라서 했던 것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학자적인 자세였던 것이다. 그는「중편조동오위」 서문에서 「글이란 내려오는 본래의 뜻이 있으니, 어찌 억측으로 하겠는가」라고 했었다.「삼국유사」에서도 한 글자의 가감도 없이 사료의 원형을 전해 주려 했던 학문 자세가 곳곳에 스며 있다. 「수릉엄경환해산보기」를 집필한 보환이 일연에게 옳고 그름을 검토해 달라는 요청을 해온 적이 있다. 이에 일연은 곳곳에서 강한 어조로 힐난한 바 있다. 「크게 잘못됐다」, 「사람을 눌러 핍박함이 어찌 그렇게 많은가?」 ,「사람을 속이는 죄가 누구에게 돌아갈 것인가?」 하는 등의 표현이 흔히 보일 정도다. 일연의 이 같은 비판적 태도는 「삼국유사」에서도 가끔 나타난다. 고려시대의 선사들이 불립 문자만을 고집하지 않고 교학에도 관심이 적지 않았음은 일반적인 경향이기도 했지만, 일연의 경우 백여 권의 저서를 남겼는데, 곧 「어록」 2권, 「게송잡저」 3권, 「중편조동오위」 2권, 「조파도』 2권,「제승법수」 7권, 「대장수지록」 3권, 「조정사원」 30권, 「선문염송」 30권, 「삼국유사」 5권 등이 그것이다. 지금은 「중편조동오위」 및 「삼국유사」가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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