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별 문화인물

서애 유성룡 (西厓 柳成龍)
1542~1607/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생애 및 업적
  •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豈)이며, 문충(文忠)의 시호를 받았다. 그는 16세에 향시에 들고 안동 도산(陶山)에 가서 퇴계에게 사사하였으며, 태학(太學)에 입학하고, 26세에 문과에 급제한 후로 관계에 나아가 이조좌랑, 도승지, 상주목사, 경상도관찰사, 대사간, 이, 예, 병조판서와 홍문관 부제학, 대제학, 대사간, 대사헌,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조선시대에 그와 같이 청요(淸要)와 현직을 모두 역임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임진왜란 때는 영의정으로 도체찰사(都體案使)가 되어 내정외교 군사를 총괄하였다. 그는 문인이며 유학자였으며 군사에도 뛰어난 지식을 갖고 있어서 임란 중의 청야책 (淸野策) 군사훈련, 산성수축 등의 전술은 그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유성룡도 임란의 전 기간을 통하여 조정의 요직(要職)을 맡고 있었으므로 당쟁중의 인물이 아니 될 수 없었고 비방과 칭찬이 엇갈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동인 중의 남인이었으므로 반대파인 서인과 북인으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다. 임진왜란이 소강상태에 들어가자 반대파의 공격과 모함을 받아 파직 되고 모든 관작(官爵)이 박탈되어(2년 후 관작을 되돌려 받았음) 고향인 안동 하회(치回)에 돌아가 은둔생활을 하며 과거를 회고하며 본인이 찬술한 차자, 장계 등을 정리하며 「징비록」, 「근폭집」, 「진사록」, 「군문등록」 등을 저술하였으며, 후에 서애집(西辰集)으로 간행되었다.


     그는 노후에 삼한(三愼)이 있다고 했는데 첫째는 임금의 은혜를 갚지 못한 것, 둘째는 벼슬이 지나치게 많고 높았는데 속히 관직에서 물러나지 못한 것, 셋째는 도학에 뜻을 두었으면서도 이룬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성룡은 조선왕조를 통해 으뜸가는 인물 중의 한 사람이었고 경세가였다. 사람들은 그를 평하여 '속이려야 속일 수 없는 인물이라'고 하였고, 임란 중에 그가 선조에게 국사가 이에 이르렀으므로 죄를 받아야 한다고 하자 선조는 '제갈공명도 한실(漢室)을 부흥할 수 없었다' 고 위로하였다. 그가 66세에 별세하여 부음이 이르자 왕은 정사를 폐하고 부의를 내려 그의 생전의 공을 치하하고, 사대부는 서울에 있는 그의 옛집에 신위를 배설하여 조곡했으며, 일반시민들은 상례보다 1일을 더하여 4일간이나 철시하고 백건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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