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도별 문화인물

만해 한용운 (萬海 韓龍雲)
1897~1944 / 독립운동가, 승려, 시인
생애 및 업적
  •  시인으로서의 한용운 1925년 만해는 사랑의 증도가 [님의 침묵]을 설악산 오세암에서 탈고한다. 그가 시인으로서 우리 문학사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은[님의 침묵] (회동서관, 1926)간행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책의 서두에 그는 '독자여 나는 시인으로서 여러분 앞에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여러분이 나의 시를 읽을 때에 나를 슬퍼하고 스스로 슬퍼할 줄을 압니다'라고 밝히면서 그러나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긔루어서 시를 쓸 수밖에 없다고 토로하고 있다. [님의 침묵]에 수록된 88편의 시는 대승불교의 보살도와 선을 통한 자기 수양의 결과를 순화된 정서로 표현하고 있다. 외세의 질곡에서 박탈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중생을, 님을 통한 사랑으로 어루만지면서 무집착 무분별 절대평등의 불이(不二)사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시 이외에 다수의 수필과 소설[죽음]을 비롯하여 [흑풍] [후회] [철혈미인] [박명]등 다섯 편의 장편소설을 남기고 있다. 종교인으로서의 한용운 한용운은 어린 시절 《인생이란 무엇인가. 밤낮 근근 살자하다 생명이 가면 무엇이 남는가》하여 삶의 본질에 대한 강한 회의를 품고 평범한 삶을 거부하고 불가에 입문하게 된다. 백담사에서 김연곡 스님을 만나 득도한 이래 철저한 자기 수련을 통한 구도자로서의 자리를 잡아갔다. 1910년에는 한일불교동맹조약 분쇄를 위해 동래 범어사에서 궐기대회를 열어 친일승 이해광을 종문난적으로 비판하고 이 동맹을 철회하게 하였다. 조선 불교 사찰령의 제정 반포와 함께 조선총독부의 전조선사찰관리가 시행되자 [조선불교유신론]을 탈고하여 조선 불교계의 제반 문제점을 지정하며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한다. 1914년에는 [불교대전] (범어사간)을 간행한다. 이는 통도사 장경강의 장경을 열람하고 주제별로 경전을 정리한 것으로 대장경 보편화 작업의 초석을 마련한 큰 업적으로 평가된다. 1924년에는 법보회를 조직하여 불교 대중화운동에 앞장섰고, 불교 청년회를 조직, 이를 불교 청년동맹으로 확대 개편하면서 불타정신의 체험, 합리종정의 확립, 대중 불교의 실현이라는 3대강경을 실천에 옮겼다. 이밖에도 불교지를 인수하여 많은 논설을 발표하는 등 종교인으로서의 만해는 민족 종교로서의 불교의 역할과 시대정신을 일깨웠던 것이다.


     독립운동가로서의 한용운 한용운은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인가를 늘 고뇌하고 실천에 옮겨 행동하는 지사였다. 쓰러져가는 민족의 암울한 현실에 그는 분연히 일어서 적극 대항함으로써 정도가 살아있음을 확인하려 했다. * 이 작은 주머니는 짓기 싫어서 짓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짓고 싶어서 다 짓지 못하는 것입니다. (潚의 秘密) 《자유는 만유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라. 고로 자유가 없는 사람은 죽은 시체와 같고 평화가 없는 사람은 가장 고통스러운 자라》(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中) 만해의 독립운동은 이러한 자유 평등의 사상에서 출발한다. 조국이 강점된 이듬해인 1911년에 만주로 망명해 이시영 등과 함께 독립군을 모으기도 했으며, 3.1운동 당시에는 33인의 민족대표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육당이 쓴 독립 선언서에 행동강령으로 공약삼장을 추가하였다. 거사 당일 만세 삼창을 선창하고 《이제 내 나라에서 죽으니 한이 없다》는 말을 남겼다. 일제의 황민화운동, 창씨개명운동, 조선인 학병출정 등을 끝까지 반대하여 투쟁하며 《청년아 만지풍설속에서도 꽃을 피우는 매화의 정절을 본받으라》고 격려했다. 한용운은 꺼져가는 민족혼의 불씨를 지피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유, 평등, 평화의 비폭력 정신으로 민족의 내일을 일깨운 선각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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