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도별 문화인물

정정렬 (丁貞烈)
1876~1938 / 판소리의 명창
생애 및 업적
  •  판소리 명창 정정렬(丁貞烈). 그는 19세기 말. ‘조선적’인 판소리 시대가 서서히 끝나갈 무렵에 태어나 오랜 수련을 통해 ‘일류 명창’, ‘국창(國唱)’의 칭호를 받았고, 훗날 평자들에게 ‘근세(近世) 오명창(五名唱)’의 하나로 꼽히는 등 최고의 명창이 소리꾼이다. 전북 익산 망성면 내촌리에서 태어나 일곱 살에 소리에 입문하였으며 서편제 명창 정창업, 이날치 등을 사사했다. 40대 무렵까지 오랜 독공과 지방에서 소리공연과 교육 활동을 주로 했으며 1930년대에 서울로 진출하여 방송과 공연, 음반 취입 등으로 대중에게 가장 사랑받는 명창이 되었다. 특히 <춘향가>를 잘 불러 ‘정정렬의 <춘향가>’의 독자적인 세계를 완성하였고, 창극 식으로 구성한 음반《춘향전 전집》,《심청전 전집》,《화용도 전집》등을 남겼다. 또 1930년대 중반 창극이 새로운 극음악 형식으로 재편될 때 연출을 맡아 현대 판소리의 전형(典型)을 마련한 명창으로 유명하다.


     <정정렬의 춘향가>의 전통은 김여란 등의 명창을 통해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어 전승되고 있다. 1938년 3월 21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정정렬은 또 소리를 잘 부르는 ‘명창’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전에도 없었고, 남과도 다른 독자적인 판소리 세계를 이룩하여 ‘정정렬의 판소리’를 완성하였다. 특히 ‘정정렬의 소리’ 중 춘향가는 그 독자적인 해석이 더욱 독보적이었다. 정정렬이라는 이름은 판소리 명창과 애호가들 사이에서 ‘정정렬 나고 <춘향가> 다시 났다’라는 말과도 통할 만큼 그의 춘향가는 남달랐으니 그야말로 ‘창의적인 소리세계를 이룩한 명창’으로 기억될 만하다.


     한편, 정정렬은 소리명창이 되는데 제일 중요한 요인인 ‘소리 목’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으나 그 약점을 독특한 음악 해석으로 극복하여 명창이 되었다. 판소리에서는 고음부의 음역이 좋지 않아 자유로운 소리 표현이 잘 안되고, 소리가 심하게 거친 목을 ‘떡목’이라고 하는데 소리꾼으로 대성하기에는 아주 치명적인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악조건을 오랜 공력으로 다듬어 내면 거칠면서도 힘이 있고, 소리의 극적인 면을 살려낼 수 있는데, 바로 그러한 가능성을 실제로 확인시켜준 대표적인 명창이 곧 정정렬이다. 정정렬은 일곱 살 무렵에 소리에 입문하여 수업을 시작하였는데,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도 입산수도(入山修道)하는 방식의 독공(篤工)을 할 만큼 무던한 노력을 기울였다. 독공은 대개 100일, 200일 단위의 기간 동안 잠자고 먹는 시간을 제외한 일과를 모두 소리 연마에 쏟는 불가의 ‘용맹정진(勇猛精進)’ 같은 공부방법이다. 대부분 성공한 명창들은 이러한 독공을 통해 소리 실력을 쌓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정정렬이 공부 열심히 하는 명창으로 평가되었다는 것은 그가 자신의 약점을 오로지 연습으로 극복한 대표적 사례임을 잘 말해준다.


     한편, 정정렬은 공력을 기울인 성음뿐만 아니라 판소리의 해석을 완전히 새롭게 하여 ‘신식 판소리’를 부른 명창으로도 높이 평가된다. 정정렬은 목이 좋지 않아 ‘성음’으로 소리의 미학을 만족스럽게 표출하지 못하는 것을 다양한 음악의 변용으로 풀어낸 명창으로도 유명하다. 판소리는 성음과 장단, 다양한 조의 변화를 자유자재로 운용하면서 사설의 극적 구성을 다이내믹하게 표현하는 음악인데, 정정렬은 성음에서 부족한 부분을 장단과 조를 다양하게 변화시키는 방법으로 보충하려고 하였다. 정정렬은 판소리 사설을 노래하면서 장단을 정격대로 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본래의 장단 보다 길게 늘이거나, 또는 앞당겨 붙이는 등 ‘엇붙이는 방법’을 구사함으로써 음악적 재미를 극대화했다. 그의 변화무쌍한 소리 장단 구사는 웬만한 고수들이 소리를 맞추기 어려운 정도였는데, 그의 이러한 시도는 이후 판소리와 기타 민속음악 및 춤의 리듬에 큰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었다. 또 청중들은 소리꾼과 고수가 절묘하게 맞춰나가는 조화로움을 만끽할 수 있어 더욱 정정렬의 소리를 즐기게 되었다. 정정렬은 또 판소리의 장단의 부침새를 변화무쌍하고 정교하게 구성하는 동시에 조(調)와 음질(音質)을 변화시키는데도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또 발성을 할 때도 밋밋하고 평평하게 하기보다는 극적 표현을 살려 흔들어 낸다거나, 밝고 씩씩한 표현보다는 애조 띤 계면조 표현을 확대시켰다. 그 결과 정정렬의 판소리는 화려하고 정교하며 세련된 표현이 넘치는 독특한 세계를 갖추게 되었는데 이를 두고 동시대 명창들은 ‘신식 판소리’라고 평하였다.


     여러 가지 판소리 중에서 정정렬은 특히 <춘향가>의 판을 아주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새롭게 탄생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정정렬은 <춘향가>를 새롭게 짜면서 소리뿐만 아니라 극적 구성과 사설의 표현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예를 들면 춘향과 이도령이 먼저 춘향모의 허락을 받은 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첫날밤을 지낸 후에야 춘향모에게 사실을 알린다든지, 사랑의 표현들이 매우 직접적으로 묘사된다든지, 이별 대목에서도 오리정에서 작별하는 장면을 더 넣어 슬픈 소리를 길게 부르도록 한 것이다. 정정렬이 짠 <춘향가>의 전편 구성을 보면 그가 소리꾼으로써 문학적 소양도 매우 잘 갖추고 있다는 평에 공감하게 된다. 특히 춘향이 멀리 떠나는 이도령을 바라보면서 '우두커니 바라볼 때 가는 대로 적게 뵌다. 달만큼 보이다가 별만큼 보이다가 나비만큼 불티만큼, 막상 고개 넘어가니 아주 깜박 그림자도 못 보겠구나' 라고 한 대목은 이별가의 명대목으로 꼽힌다.


     정정렬은 1930년대에 방송과 공연활동, 음반 취입으로 가장 유명한 스타 명창이 되었다. 50대가 넘어 뒤늦게 서울의 중앙 무대로 진출해 작고하기 전까지 10년 동안 정정렬은 후배 판소리 명창과 청중들에게 큰 인기를 누렸다. 김여란, 박녹주, 김소희 등, 당대 최고의 여류명창과 박동진, 김연수 등의 남자명창들이 줄지어 그의 문하에 들었으며, <조선성악연구회>에서는 가장 제자가 많은 스승이었다. 그리고 판소리 명창으로서는 JODK 방송에 가장 많이 출연하였고, 빅타와 폴리돌 등의 음반회사의 초청으로 음반사에 기리 남을 대규모 전집 음반을 녹음하는데 참여하기도 하였다. 특히 정정렬은 소리를 창극 식으로 구성하여 녹음하는 방식을 생각하여 <춘향전>, <심청전>, <화용도> 등의 전집을 냈는데, 그가 소리를 창극 식으로 부르고, 기악 반주를 붙여 녹음한 기획은 여러모로 성공적인 결과를 낳았다.


     정정렬은 1936년 무렵 창극사의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하는데도 크게 기여하였다. 1902년 원각사에서 처음으로 시도된 창극은 비록 무대에서 연극 식으로 소리하는 공연으로 자리를 잡아갔지만, 193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소리의 배역을 나눠 부르는 식의 ‘분창(分唱)’ 형식의 공연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리고 하나의 줄거리가 있는 창극을 여러 날에 걸쳐 연속해서 공연하는 식의 ‘연쇄(連鎖) 창극’ 도 시도되었는데, 처음에는 청중들의 흥미를 끌었으나 점차 관심이 저조해지고 말았다. 바로 이 무렵 정정렬은 창극의 연출을 맡아 창극의 소리와 대사는 전통성을 살려 품위와 격조를 더하고, 극적으로는 하루 공연에서 기승전결의 구조가 완결되도록 구성하며, 소리꾼들이 직접 연기를 하면서 소리를 불러 소리와 극이 겉돌지 않고 조화롭게 표현한 신 형식의 창극을 선보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공연장인 동양극장에는 연일 관람객이 넘쳤고, <춘향전>이 큰 성공을 거두자, 그 여세를 몰아 <흥보가> 등의 후속프로그램을 속속 발표함으로써 1936년은 그야말로 창극사에 신기원을 마련하였다. 그가 시도한 창극은 오늘날까지 창극의 전통으로 이어져 오고 있으며, 정정렬의 이러한 노력에 주목한 판소리 학자 중에는 그를 ‘현대 창극의 아버지’라는 말로 그의 공로를 평가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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