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도별 문화인물

박은식 (朴殷植)
1859~1925 / 한말의 민족사학자, 독립운동가
생애 및 업적
  •  박은식 선생은 구한말시기부터 일제강점기에 걸쳐 활동한 민족사학지이며, 독립운동가로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제2대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박은식은 서양세력의 팽창의 물결이 한반도에 밀려와서 민족적 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한 시기인 1859년 음력 9월 30일 황해도 황주군 남면에서 한 농촌 서당 훈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박은식의 본관은 밀양이었고, 자는 성칠, 호는 겸곡 또는 백암 이라고 하였다. 니라가 망해서 중국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할 때에는 때때로 박기정이라는 별명을 쓰기도 했고, '태백광노'(태백광노: 한국의 나라가 망하여 미친 노예라는 뜻), 또는 '무치생'(무치생: 나라를 잃고도 부끄러움을 모르고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라는 별호를 쓰기도 하였다.


     박은식은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면서 당시의 의병운동을 최고의 애국운동으로 높이 평가하고 지지하였다. 이것은 당시에 박은식이 「서북학회월보」를 비롯해서 여러 잡지들에 임진왜란과 병자, 정묘호란 때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과 백성들을 한국의 '인물'로 높이 평가하면서 소개하여 간접적으로 의병운동을 지지하고 고취한 곳에서 이를 알 수 있다. 또한 이것은 박은식이 그 후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의병운동을 매우 높이 평가한 곳에서도 거듭 확인된다. 국권회복을 위한 한국민족의 역량을 배양하는데 종합적으로 가장 큰 기여를 했으며, 전국적으로 국민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애국계몽 사상가이며 애국계몽운동가의 하나로 활동하였다.


     박은식은 일제 침략사를 중심으로 하여 한국근대사를 서술함으로써 대외적으로 일본제국주의 침략의 잔학성과 간교성을 폭로 규탄하고, 대내적으로 '통(아픔)'을 가르쳐 주어 민족적 통분의 격발에 기초한 독립운동의 정신적 원동력을 결정하여, 국혼을 유지 강화하고, 자손만대의 반성을 촉구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박은식의 「한국통사」는 처음으로 한국근대사를 체계화함과 동시에 한국의 근대역사학을 창건한 고전의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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