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도별 문화인물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
1055∼1101 / 고려시대의 승려
  • 11월의 문화인물로서는 고려시대 천태종의 개조(開祖)이며 선(禪)과 교(敎)의 수행을 함께 추구한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 : 1055∼1101)) 선생을 선정하였다.
생애 및 업적
  •  왕자로 태어나 11세에 출가하고 47세로 입적할 때까지, 오직 구법(求法)과 전등(傳燈)을 발원하며 수행과 학문과 강학(講學)으로 일생을 살았던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 그는 고려 전기의 대표적 고승이면서 탁월한 불교 학자였고, 우리나라 천태종의 시조였다. 그리고 교장(敎藏, 즉 續藏經)의 간행, 천태종의 창설, 활발한 국제 교류 등 그의 활동과 업적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아시아불교 전체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의천은 문종의 넷째 아들로 어머니는 인예태후(仁睿太后) 이씨로 1055년(문종 9)에 태어났다. 이름은 후(煦), 자는 의천(義天), 대각국사는 그의 국사호다. 국사 32세 때에 송의 철종이 즉위함에 그의 휘 후(煦)를 피하여 이때부터 이름 대신에 자 의천을 사용했다. 그는 불교학에 대한 깊고 넓은 이해를 가졌기에 장소의 수집과 {신편제종교장총록}의 편성, 교장의 조판과 그 전파 등의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이러한 그의 업적은 세계 불교사에서도 선구적인 것이었다. 불교 교학의 연구서만을 집대성하여 간행한 교장은 장소의 보존과 유포는 말할 것도 없고, 동아시아 불교계의 교학 연구에 크게 이바지했기 때문이다.


     그의 여러 업적 중에서도 그의 천태종(天台宗) 개창이 갖는 의의는 적지 않다. 그는 천태종 개창의 뜻을 일찍부터 갖고 있었는데, 지자대사탑(智者大師塔) 아래에서의 발원으로 이 의지를 더욱 다졌다. 그의 천태종 설립 과정은 인예태후(仁睿太后)가 국청사(國淸寺)를 짓기 시작한 선종 6년(1098)부터 비롯되었다. 그리고 그는 승려들을 적극적으로 모집하여 1,000여 명이 동참하는 성과를 얻었다. 국청사가 완공되고 국사가 이 절의 주지로 취임하여 천태교관(天台敎觀)을 강설하게 됨으로서 고려의 천태종은 개창되었으니, 곧 肅宗 2년(1097) 5월의 일이었다. 국사는 선교(禪敎) 통합을 위해서 노력했는데, 천태종 창립이 당시 선종에 미친 영향은 대단했다. 선종 승려 중에 천태종으로 옮겨 온 자가 10명 중 6·7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국사는 교종인 화엄종과 선종인 조계종 모두에서 발견되는 선교 어느 한 쪽의 결함을 보완하기 위해 선교의 통합을 지향했다. 그는 화엄종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 교관병수(敎觀幷修)를 주장하고, 선교일치사상으로 선종을 포섭하려 했던 것이다. 의천은 교장을 간행하고, 천태종을 창설했으며, 교관병수를 주장하기도 했다. 이것은 모두 그의 업적이자, 사상적인 특색이지만, 교학 연구 자세나 방법이 갖는 현대적 의의 또한 적지 않다.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는 학구열, 전통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되 천년 이후를 생각하는 진지한 자세, 동아시아 불교의 보편성과 신라 불교의 특수성에 대한 균형 있는 인식, 활발한 국제학술교류, 방대한 자료의 수집, 엄격한 비판과 정밀한 교정, 후학을 위한 계속된 강의 등의 진리 탐구 자세는 지금도 그 빛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빠른 이동 메뉴
  • 주소 : (03060) 서울시 종로구 종로구 율곡로 33 안국빌딩 7층
Copyright © KCDF.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