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도별 문화인물

해수 김승호(海壽 金勝鎬)
1917~1968 / 한국의 배우
생애 및 업적
  •  김승호(金勝鎬) : 1917-1968, 본명은 해수(海壽). 1946년 영화 《자유만세》로 데뷔하여 동양극장·신협(新協) 등에서 25년 동안 연극생활을 하였고, 영화인협회 이사장을 역임. 주요작품 : <시집가는 날>,<육체의 길>,<돌무지> 김승호는 많은 사랑을 받았던 한국영화계의 스타였지만 의외로 출생이나 성장 등 사생활이 명확히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있어, 정확한 성장기를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시절 청진동 부근에서 성장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자랐던 청진동은 서울 4대문 안의 중심부였으며, 그 당시 종로 쪽으로는 관철동에 우미관극장, 인사동 초입에는 조선극장, 더 위쪽에는 단성사가 자리 잡고 있었으며 서대문 쪽으로는 지금의 문화일보사 건물 자리에 동양극장, 을지로 쪽에는 황금관(후일의 국도극장), 명동 쪽에는 명치좌(후일의 국립극장) 등이 명소로 이름을 날렸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자란 그는 주변의 극장들을 수시로 드나들며 영화와 연극을 보았고, 보성고보 1학년을 넘기면서는 학교 가는 날 보다 빠지는 날이 더 많아지면서 급기야 학교를 그만두었으며, 우미관, 단성사, 동양극장 등을 들락거리며 연기의 꿈을 키우게 된다.


     결국 김승호는 동양극장의 배우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되는데, 그를 배우의 길로 이끌어준 것은 종로의 주먹패로 이름을 날리던 김두한이었다. 종로통을 근거지로 삼고 있던 김두한은 부지런히 극장을 드나드는 그의 배우적 기질과 열정을 눈여겨보았고 그를 동양극장의 극단에 소개해준 것이다. 오랜 무명시절을 거치기는 했지만 그의 끊임없는 노력이 점차 결실을 보게 되는데, 극단 청춘좌가 공연한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를 영화화한 <홍도야 우지마라>에서, 큰 빛을 보지는 못했지만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다. 1945년, 김승호는 '자유극장'(自由劇場)의 창립단원으로 연극계에서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자유극장'이 해체되자 최남현, 주선태 등과 함께 극단 '청탑'(靑塔)을 창단하였으며 극단 '대지'(大地)를 만들어 대표를 맡기도 했다. 그 후에도 그는 '낭만극장'(浪漫劇場), '전진극장'(前進劇場) 같은 연극단체를 만들어 활동을 계속하기도 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스타의 길로 들어섰던 것은 오영진(吳泳鎭)의 작품 <맹진사댁 경사>를 <시집가는 날>로 각색한 영화에 출연한 후였다. 이 영화는 1957년 5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제4회 아시아영화제에 출품되어 특별상(희극상)을 수상했다. 한국영화가 국제영화제에서 거둔 최초의 성과였다. <시집가는 날>은 당시 한국영화의 대표작처럼 인식됐고 1957년 독일에서 열린 제8회 베를린 영화제와 1959년 호주의 시드니 영화제에 출품되면서 한국영화가 국제영화제에 참가하는 선봉장 역할을 했다. 김승호는 그 영화에서 주목받는 연기자로 떠올랐고, 영화배우로서의 새로운 인생도 함께 열렸다. 출연 편수가 늘어날수록 김승호의 연기력은 물오른 듯 원숙해졌고 인기는 올라갔다. 1959년에 이르러서는 무려 16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한 해 동안 제작되는 한국영화의 10분의 1에 해당할 정도의 숫자였다. 그런 중에서도 <곰>(조긍하감독)은 문교부 제정 우수영화에 선정되었고 <육체의 길>(조긍하감독)은 흥행 돌풍을 일으켰다. 영화계에서 김승호의 존재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독보적인 수준에 이르렀다. 신상옥 감독이 연출한 <로맨스 빠빠>에서 주연한 김승호는 일본 도쿄에서 열린 제 7회 아시아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돌풍을 일으켰다. 당시로서는 아시아 영화제의 명성과 권위는 대단했고, 그런 영화제에서 당당하게 주연상을 받았다는 사실은 개인적 명예의 차원을 넘어 한국영화의 위상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계기였다. 그는 이 영화로 웬만한 국내 영화상을 휩쓸다시피 했다. 제 4회 부일(釜日)영화상(부산일보 주최) 주연상, 제 2회 문교부 최우수영화상과 주연상을 수상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문교부의 영화상은 1961년부터 대종상(大鐘賞)으로 명칭이 바뀌어 오늘날까지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1960년 한 해 동안 모두 13편의 영화에 출연한 그는 또 하나의 기억할만한 작품을 남겼는데, 강대진 감독이 연출한 <박서방>이란 영화였다. 아궁이나 구들 고치는 일을 하면서 가족들을 부양한 서민 아버지와 그 가족들이 엮어 가는 일상생활의 내면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이 영화는 김승호에게 제 8회 아시아 영화제의 남우주연상과 부일영화상 남우주연상을 안겨주었다. 제7회 아시아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데 이어 2년 연속 주연상을 받은 사실은 김승호 자신뿐만 아니라 영화계로서도 큰 기쁨이었다. 또한 <마부>는 제11회 베를린 영화제에 출품되어 본상인 은(銀)곰상을 수상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김승호는 60년대 중반을 넘기면서 어느 때부턴가 영화제작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1967년에 대양영화사라는 회사를 차린 그는 첫 영화 <돌무지>를 제작하면서부터 배우보다는 제작자로서의 활동에 더욱 매진했다. 이 영화는 제6회 대종상에서 최우수 반공영화상을 받았으나 흥행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돌무지> 이외에도 <사화산>, <머슴 칠복(七福)>등 6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영화제작은 그에게 감당할 수 없는 짐을 지게 했고 그로 인해 건강을 잃었다. 그 해 10월 13일, 부도로 인해 한때 한국영화계를 대표하던 연기파이자 인기배우였던 김승호는 종로경찰서에 구속되는 처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살고 있던 집까지 팔아 빚을 청산하긴 했지만 그동안 쌓아온 인기와 명예와 부는 거품처럼 날아가 버리고 남은 것은 허탈한 실망감뿐이었다.


     영화를 사랑하고 연기를 사랑했던 김승호는 1968년 12월 1일 청진동 셋집에서 고혈압으로 쓰러졌고,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가난하고 어려운 시절을 따뜻하게 감싸준 위대한 스타가 안타까운 최후를 맞은 것이다. 당시 세종로 시민회관(현재 세종문화회관 자리) 뒤편에 있던 예총회관에서 영화. 연극인 장으로 장례식이 거행되었고, 수많은 영화인들이 그의 영구차를 뒤따라 광화문에서 동대문까지 행렬을 이루었다. 그의 뒤를 이어 영화배우로 1970-80년대 한국영화계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던 아들 김희라도 건강을 잃어 정상적인 활동을 하기 어려운 처지다. 김승호의 열정과 땀이 밴 트로피나 유품들은 인천의 어느 암자에 맡겨진 채 먼지 속에 묻혀있다. 이제라도 그를 기리는 일을 시작해야할 것이며 그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던 위안과 여유를 되살리며 기억하는 일은 한국영화의 역사를 지키는 일이며, 후세 사람들이 해야 할 몫이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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