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도별 문화인물

무애 양주동(无涯 梁柱東)
1903-1977 / 시인·국문학자
생애 및 업적
  •  양주동(梁柱東) : 1903-1977, 호는 무애(无涯). 시인, 국·영문학자, 동국대· 연대교수 역임, 신라 향가 등 한국 고가를 연구하여 초기 국어학계에 큰 업적을 남김.


     주요작품: 《조선고가연구》, 《여요전주》


     양주동은 음력으로 1903년 6월 24일 경기도 개성에서 아버지 남원 양씨 원장(元章)과 어머니 강릉 김씨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그 이듬해 황해도 장연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성장한다. 여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열두 살 때 어머니마저 여읜 천애의 고아가 된다. 양주동은 3.1운동 이듬해인 1920(18세)년에 신학문을 배우려고 상경하여 중동학교 고등속성과에 입학한다. 그는 수학과 영어 학습에 열중하면서 1년 만에 중학교 전 과정을 마친다. 1928(26세)년에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한다. 이듬해에 그는 <조선의 맥박>이라는 시를 발표한다. 그리고 그 다음 해인 1930(28세)년에 시집 ≪조선의 맥박≫을 상재한다. 그는 1937(35세)년 ≪청구학총(靑丘學叢)≫ 제19호에 <향가의 해독, 특히 원왕생가에 취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일본 학계의 아성을 극복하고 한국학계에 혜성처럼 나타났다. 그 결과물이 1942(40세)년 그가 쓴 향가 연구서 ≪조선고가연구(朝鮮古歌硏究)≫다. 양주동은 1947(45세)년 동국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여 고려가요 연구서 ≪여요전주(麗謠箋注)≫를 펴낸다. 양주동이 그의 생애에서 가장 크게 성취한 것은 한국인의 옛 노래를 연구한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역저로 향가를 연구한 ≪조선고가연구≫와 고려가요를 연구한 ≪여요전주≫ 이 두 책은 그가 성취해낸 학문을 대표하는 결과물이다.


     양주동의 업적에는 유달리 많은 칭호가 뒤따른다. 타고난 천재적 재질과 남다른 창작욕과 학구 욕이 그런 다양한 이름을 남겨 놓은 것이다. 그는 한국문학을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다. 그 시대가 한국문학을 위해서 양주동을 불러낸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양주동은 한국문학을 올바로 읽고 새롭게 해석하는 것은 물론 그 독창성과 세계성을 발견해 내면서 그것을 가르쳤으며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시와 수필을 쓰고 비평을 하는 한편 외국문학과 한국문학을 번역과 번안으로 소개하면서 다른 하나의 광활한 지평을 열어나간 이다. 그는 민족의식과 극일 사상으로 척박한 한 시대를 개척해나간 비범한 문화인이라 할 수 있다. 양주동은 한국문학 연구의 1세대 학자로 우리나라의 최남선, 정인보, 이광수, 방종현, 이희승, 조윤제, 이병기 등과 일본의 금택장삼랑(金澤庄三郞), 점패방지진(鮎貝房之進), 소창진평(小倉進平) 등이 그와 같은 시대의 학자였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 한국문학 연구로 일관한 대표적인 학자는 양주동과 조윤제, 이병기 세 사람뿐이다.


     양주동은 청나라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한국 고시가 주석에 큰 기여를 하였다. 양주동의 학문은 그 수단과 방법으로는 국어학이지만, 목적은 국문학 곧 고전시가 연구이다. 그 중에서도 향가와 고려가요의 연구이다. 양주동의 많은 학술 논저들 중 한국 고시가연구와 무관한 것은 5∼6종에 불과하며, 대부분의 논저들이 향가와 고려가요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양주동의 한국 고시가연구 업적은 크게 두 가지로 대별된다. 첫째는 해독과 주석의 어학적인 연구이고, 둘째는 그 밖의 것을 총괄하는 문학적인 연구다. 양주동이 대학에서 전공한 서구문학 연구를 뒤로하고 한국문학 연구를 전공으로 선택한 것은 당시의 상황논리로 볼 때 일본을 이기고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는 극일의 유일한 방법은 학문뿐이라는 판단에 있었다. 이처럼 투철한 민족의식으로 무장된 정신세계와 동서양을 아우르는 탁월한 문학적 소양, 그리고 당시로서는 새로운 연구방법이 동원되어서 향가와 고려가요의 성공적인 문학적 주석이란 미증유의 결실을 만들어냈다.


     양주동은 한국의 고시가연구에 대한 튼실한 기반을 조성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양주동을 일컬어 당대를 대표하는 국어국문학자라고 한다. 양주동은 "어려서부터 평소의 야망은 오로지 '불후(不朽)의 문장'에 있었으매, 시인, 비평가, 사상인이 될지언정 '학자'가 되리란 생각은 별로 없었다"고 한다. 그는 묵자, 순자, 공자처럼 '양자(梁子)'가 되어 위대한 사상가의 반열에 들기를 열망하였다. 그의 시집 《조선의 맥박》(1932)에는 시가 53편 수록되어 있는데 그의 시가 ≪조선의 맥박≫ 출간 이후에 발간된 사화집에 거의 수록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의 시가 우리 문학에서 높이 평가되었는지 알 수 있다 . 또한 양주동은 수필 다음으로 많은 분량의 비평적 단문을 발표한 바 있다. 그의 비평적 산문은 대체로 그 길이가 짧고, 논쟁적인 내용이 많으며, 논지에서 자주 이탈하면서까지 지식과시형의 진술이 많고 주제에 관련된 논의보다 어휘와 부분적 국면에 대한 훈고학적 미세 담론이 우세한 비평적 양상을 흔히 드러내고 있다.


     양주동의 창작과 비평 관련 작업은 이처럼 여러 영역에 걸쳐 광범위하고도 풍부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양으로만 친다면 고전문학이나 어학 분야에서 거둔 업적보다 훨씬 다양하고 풍성한 편이다. 양주동은 사상보다 지식에 관심이 많았고, 세계를 구성하는 원리에 관한 것보다 지식의 눈으로 부분적 현상을 조회하는 일에서 그의 재능이 발휘되었다. 한국문학사 속에서 그의 시와 비평과 수필 등 모든 작품이 중요한 문학사적 가치를 갖고 있으며, 이달의 문화인물 선정을 계기로 이의 올바른 조명을 위한 노력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빠른 이동 메뉴
  • 주소 : (03060) 서울시 종로구 종로구 율곡로 33 안국빌딩 7층
Copyright © KCDF.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