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야별 문화인물

율곡 이이 (栗谷 李珥)
1536~1584 / 조선 중기의 학자, 정치가
생애 및 업적
  •  율곡 이이는 조선조 중종 31년 음력 12월 26일에 태어났다. 덕수 이씨로 아버지는 원수,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이다. 자는 숙헌, 호는 율곡, 석담, 우재라 했다. 일생동안 일한 그의 업적과 사상적 특징을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율곡은 남을 위해 일하는 것을 평생의 신조로 삼았다. 그는 사람점이 깨끗하고 마음이 넓었으며 솔직 담백했다. 가정에서는 항상 가족들에게 사랑으로 대했고 일가친척 누구에게나 따스한 정을 베풀었다. 일가친척 중에 가난한 사람이 있는 것이 안타까워 그는 서울에 있는 집을 팔아 고향 파주에 집 한 채를 장만하고서 모든 일가친척을 다 모아서 함께 살았다. 한때는 식구가 백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가까운 친척에 대한 이런 사랑을 모든 이웃에게 미뤄서 백성 위하는 정치를 베풀기 위해 그는 정성을 다했다. 청주목사(淪州牧使), 황해감사(黃海監司) 등 지방 장관이 되었을 때는 향약(鄕約, 지방 마을마다의 자치규약)을 만들어 지방 백성의 경제생활과 도덕관념을 향상시키는 데 노력했고 중앙의 높은 벼슬에 있을 때는 부정부패의 일소에 전력을 기울였다.


     둘째, 율곡은 개혁주의자였다. 시의적절(時宜適切)하게, 그 시대에 알맞게 개혁정치를 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율곡이 활약한 시기는 조선조가 개국한 지 150여 년이 된 시대였다. 따라서 정치제도나 행정기구가 오랜 세월 구습에 젖어 경색화되어 있었다. 정치, 경제뿐만 아니라 문화, 학술계도 관학(官學)으로 굳어져 있었다. 지배계급(양반)이 형성되어 어떠한 변화도 거부하고 있었다. 변화는 곧 자기가 속한 계층의 이익을 상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율곡은 끊임없이 개혁을 주장했다. 나라를 살리고 백성을 구하는 오직 하나의 길이었던 것이다.


     셋째, 율곡은 청렴하고 능력이 뛰어난 행정가였다. 천성이 부지런하고 항상 공부하는 자세였으며 실질적인 효과를 얻는 행정을 강조했다. 그는 '정치는 때를 아는 것이 귀중하고 일은 실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政裳飾時 事要務寶)'라고 했다. 율곡은 또 남을 위해 몸 바쳐 일한다는 사명감에 투철했기 때문에 청렴결백했다. 후세 학자들은 율곡을 실학(責學)의 실마리를 열어 준 인물이라고 한다. 그는 정치, 경제, 문화 각 방면에 있어 공리공론(空理空論)을 배격하고 실질적인 성과를 추구했고 현실생활과 직결되는 정책수립을 늘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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