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야별 문화인물

고운 최치원 (孤雲 崔致遠)
857~? / 신라시대의 학자
  • 문화체육부는 신라말기 학자이자 문장가인 최치원 선생을 2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신라말기 신흥가문 6두품 출신으로 독점적 신분체계 한계의 타파에 노력하고 중앙 진골 귀족의 부패와 지방 세력의 반란 등 사회모순을 목격 개혁안 (시무10여조)을 제시 하였다. 특히 유교, 불교, 도교 및 노장사상에도 조예가 깊었던 중세적 지성의 선구자이다.
생애 및 업적
  •  신라말기의 학자, 문장가.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고운(孤雲), 혹은 해운(海雲) 인 최치원 선생은 경주 사량부(沙梁部) 출신으로 원성왕의 원찰인 숭복사(崇福寺)창건에 관계한 견일(肩逸)의 아들이며, 신라 골품제에서 6두품(六頭品)으로 신라의 유교를 대표할만한 많은 학자들을 배출한 최씨 가문 출신으로 이른바 신라말기 3최(崔)의 한사람으로 6두품 출신의 지식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868년(경문왕8)에 12세의 어린나이로 당나라에 유학한지 7년 만에 과거에 급제, 선주 율수현위(宣州 水縣尉)가 되고 승무랑(承務郞), 시어사(侍御史), 내공봉(內供奉)에 올라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문명(文名)을 천하에 떨치게 된 것은 879년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고변이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어 이를 칠 때 고변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서기의 책임을 맡으면서부터였다. 고변의 종사관으로 있을 때 공사 간에 지은 글이 표(表), 장(狀), 격(檄), 서(書), 위곡(委曲), 거첩(擧牒), 제문(祭文), 소계장(疏啓狀), 잡서(雜書), 시 등 1만여 수에 달하였는데, 귀국 후 정선하여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을 이루게 되었다. 이 가운데 특히 『토황소격(討黃巢檄)』은 명문으로 이름이 높다. 885년 귀국하여 시독겸 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지서서감(知瑞書監)이 되었으나 문란한 국정을 통탄하고 외직(外職)을 자청, 태산(太山 : 지금의 전북 태인) 등지의 태수(太守)를 지냈다. 894년 시무(時務) 10여조(條)를 상소, 아찬(阿)이 되었다. 그 후 관직을 내놓고 난세(亂世)를 비관,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 해인사(海印寺)에서 여생을 마쳤다.


     글씨를 잘 썼으며 유교와 불교의 조화에 노력한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은 신라시대의 화랑도(花郞道)를 말해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으며, 쌍계사의《신감선사비문》 이 유명하다. 선생은 또한 유교사관(儒敎史觀)에 입각해서 역사를 정리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연표형식으로 정리한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이다. 여기에는 거서간(居西干), 차차웅(次次雄),이사금, 마립간(麻立干) 등 신라왕의 고유한 명칭이 모두 야비하여 족히 칭할만한 것이 못된다고 하여 왕(王)으로 바꾸었는데 유교사관에 입각해서 신라문화를 이해하려는 역사 인식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고려 현종 때 내사령(內史令)에 추증, 문묘(文廟)에 배향(配享), 문창후(文昌侯)에 추봉(追封)되었다. 조선시대에 태인(泰仁)의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慶州)의 서악서원 (西岳書院)등에 종향(從享)되었다.


     저술로는 시문집으로 <계원필경>, <금체시>,<오언칠언금체시>, <잡시부>, <중산복궤집> 등과 사서(史書)로 《제왕연대력》 이 있으며, 불교 관련되는 저술로 <부석존자존>,<법장화상전>, <석이성전> 등이 있었으나, 오늘날 전하는 것은 <계원필경>, <법장화상전>, <사산비명(四山碑銘)> 뿐이고 그외 <동문선>에 시문 약간, 사기(寺記)등에 기(記), 원문(原文), 찬(讚) 등이 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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