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야별 문화인물

허준 (許浚)
1546~1615 / 조선 중기의 의학자
생애 및 업적
  •  우리나라에서 의학이 발달되기 시작한 이후로 우리에게 이름이 가장 많이 알려진 의인(醫人)을 들라면 허준을 들 수 있다. 허준이 이렇게 많이 알려진 이유는 그의 저서인 <동의보감(東醫室鑑)>이 우리나라의 의학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의보감>을 저술한 허준에 관해서는 잘 알려진 이름에 비해 그의 생애에 관해 찾아볼 수 있는 기록들은 많지 않다. 다만 허준의 가문에 전해져 오는 양천허씨세보(陽川許氏世譜)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상의 단편적인 양평군 허준의 영정기록에 의지하여 그의 생애를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허준의 생애에 관한 것들 중 전설적인 부분은 배제하고 단지 확인할 수 있는 기록에 의한다면 청소년기의 기록이 없어 그의 의학수업 과정에 관해서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허준은 1546년 3월5일에 허론(許論)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그의 증조부 지(芝)는 영월군수(寧越郡守)를 지냈고, 조부(祖父) 곤(琨)은 무과(武科)에 등과(登科)하여 경상우수사를 지냈으며, 부친(父親) 론(論)도 역시 무관(武官)으로 용천부사(毫川府使)를 역임한 무인(武人) 가정의 서자(庶子)로 태어났다. 그가 서출(庶出)이라는 기록은 없으나, 당시에는 중인계급이 진출하던 의인(醫人)의 길을 택한 것으로 보아 추측할 수 있고 또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중에 그가 당상관(堂上官)의 위계(位階)를 받게 되었을 때 조정의 간관(諫官)들의 반대가 심했었음을 보아서 알 수 있다.


     그에 관한 <조선왕조실록>상의 기록은 선조2년 (1569년)부터 광해군7년 (1615년)까지 보이는데, 여기서 허준의 생애연구에 의미가 있는 기록들만 선별해서 연대순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569년 6월 (선조2년)에는 유희준의 부인(婦人)의 설종(舌腫)을 치료한 기록이 처음으로 보이고, 1570년 (선조3년)에는 선조의 체병(滯病)을 치료했다. 1578년에는 선조가 보주동인유혈침후도철을 허준에게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1581년 5월에는 중국 육조시대(中國 六朝時代)의 고양생(高陽生)이 지은 찬도맥결(纂圖脈訣)을 교정하여 찬도방론맥결집성(纂圖方論脈訣集成) 4권을 저술했다. 1587년 12월에는 선조의 병을 고침으로 해서 호피(虎皮)를 하사 받았다. 1590년 12월에는 두창(痘瘡-천연두)이 전국적으로 유행하여, 왕세자(王世子)의 제(弟)가 죽고, 왕세자(王世子)도 증세가 매우 위중하여, 거의희망이 없었는데 이를 허준이 치료하였다. 이에 선조가 허준을 당상관(堂上官)으로 특별히 명(命)하여 승진시켰다. 그러나 사헌부(司憲부)와 사간원(司諫원)에서 허준의 특진을 취소시키기를 청하였다. 1592년 (선조25년)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니 허준은 선조의 천리(千里)피난길에 처음부터 끝까지 왕의 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왕을 호종(雇從)하였다. 그리하여 그 공(功)을 기록하게 하였다. 1596년에는 왕세자의 이질이 오래된 것을 허준이 치료하여 다시 선조가 허준에게 가자하였으나 사간원 등에서 중인(中人)출신에게 동반(東班)은 외람하다 하여 개정하기를 청하였다. 이해에 선조의 명으로 <동의보감>의 편찬을 시작했다 1602년에는 두창의 치료를 위해 어의 허준에게 명하여 언해두창집요 2권을 편찬케 하였다. 또한 언해구급방을 간행하였다. 1604년에는 충근정량호성공신 삼등에 봉하였다. 1606년 정월에는 양평군 정일품 보국숭록대부를 가자하였으나 중인출신에게 당상관의 위계를 줌이 불가하다는 반대가 심하여 다시 취소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선조는 수차례에 걸쳐서 허준을 옹호하고 있는 기록들을 볼 수 있다. 1608년 정월에 언해태산집요를 개편했다. 이해에 수년간 병을 앓아오던 선조가 승하했는데 허준은 당시 수의였다. 따라서 약의 경중을 가리지 않고 태만하게 투약해서 왕의 병을 고치지 못했다 하여 조정에서는 허준에게 책임을 물어 관작을 삭탈하여 파직시키고 적소에 유배시켰다.


     1609년 광해군 원년에는 그동안 왕의 의관으로서의 허준의 공을 기려서 다시 방환을 명했다. 이때에도 조정에서는 반대가 많았으나 왕은 세자시절부터 허준에게 질병치료를 많이 받아온 고마움과 당시에 노련한 의관이 없음을 들어 간관들의 반대를 물리쳤다. 그리하여 그해 11월에는 다시 수의가 되었다. 1610년 8월(광해군 2년)에 15년간의 연구 노력 끝에 총 25권 25책의<동의보감>을 완성했다. 이에 왕은 내의원에 명하여 인출광포(印出廣布)하게 했다. 그리고 허준의 공로를 치하하고 숙마일필을 하사했다. 1613년 2월에 허준이 저술한 신찬벽온방 1권을 내의원에서 간행했다. 이해 10월에는 전염병이 유행했는데, 반진이 가을부터 치열하게 발생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런데 이 전염병의 증세는 그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증세였다. 이에 왕은 허준에게 이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할 수 있는 의서를 찬술케하여, 그해 12월에는 방역신방 1권을 내의원에서 간행하였다. 이때의 전염병을 당독역이라 불렀다. 같은 해 11월에 <동의보감> 25권 25책이 훈련도감활자로 개간되었다. 1615년 (광해군7년) 11월10일과 11월13일에 중지했던 허준의 보국추증여부를 논했고 13일에는 보국추증을 결정했다. 이에 따라 허준은 보국숭록대부양평으로 추증되었다. 이와 같은 기록으로 볼 때 허준은 1615년 11월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양천허씨세보>에 의하면 허준의 부인은 안동 김씨이고 슬하에 외아들로 파주목사를 지낸 겸을 두었다. 허준의 묘는 장단군 장단면 하포리 암동(현재의 파주군 진동면 하포리 광암동)에 있다고 되어있다. 이상은 허준의 생애에 관해서 확인할 수 있는 기록들 중에서 의미가 있는 것들만 선별해서 기술한 것이다. 아쉬운 것은 허준이 이룩한 의인으로서의 지대한 업적과 학술적으로 뛰어난 업적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극심한 적서의 차별과 그가 한낱 행림출신이었던 연유로 그의 생애가 사적에서 누락되어 좀 더 정확한 허준의 생애를 알 수 없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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