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야별 문화인물

안익태 (安益泰)
1906~1965 / 작곡가, 지휘자
생애 및 업적
  •  애국가의 작곡자 안익태 선생은 1906년 12월5일 여관을 경영하는 중류가정의 셋째 아들로 평양에서 태어났다. 선천적으로 음악적 재능을 지닌 안선생은 6세 때에 동네의 예배당에서 흘러나오는 찬송가에 이끌리어 집안 몰래 교회에 나가 찬송가를 부르기도 했고 특히 교회에서 풍금(오르간)을 만져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 안선생의 인생을 결정짓게 된 중요한 동기중의 하나였다. 또 하나의 동기는 이듬해에 큰형이 동경에서 사다준 바이올린 이었는데, 이 바이올린은 그로 하여금 더욱 음악에 매혹되게 했을 뿐 아니라 6개월을 연습한 후에는 찬송가를 연주할 수 있게까지 되었던 것이다.


     1914년 평양 종로보통학교에 입학하자 학교 취주악대에서 부는 트럼펫 소리에 매료되어 아버지를 졸라 트럼펫을 손에 넣게 되었고 그 후부터는 학예회 때 마다 으레 한손에는 바이올린을 또 한손에는 트럼펫을 들고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했다. 1918년 숭실중학에 입학하자 교장은 그의 음악적 재능에 탄복한 나머지 곧 바로 관현악단에 입단 시켰고 2학년이 되어서는 음악부장이 되어 매주 한 번씩은 집에 있는 축음기를 학교로 가져가 음악감상회를 여는 등 그의 음악활동은 열도를 더해갔다. 평양 숭실학교(崇實學校) 재학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가담, 퇴학당한 뒤 일본에 건너가 중학을 마치고 구니타치[國立]음악학교에 들어가 첼로를 배웠다. 이후 1932년 미국 필라델피아 커티스음악학교에 입학, 첼로와 작곡을 배우는 한편 신시내티교향악단의 제1첼로 주자로 활약하였다. 1934년 헝가리로 건너가 도야니에게 작곡을 배우며 민족주의정신과 기법에 영향을 받았다. 이듬해 빈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게 주로 지휘법을 사사하고 1936년에는 몇 년 전 미국에서부터 착상해 왔던 《애국가》를 작곡했다.


     애국가를 작곡한 그해 8월 1일 베를린에서는 올림픽이 열렸다. 바로 이 올림픽에는 비록 일장기를 달기는 했지만 마라톤의 손기정 선수를 비롯한 7명의 한국선수가 참가하고 있었다. 안선생은 입장식이 끝나자 이들을 찾아가 애국가의 악보를 내놓고 이것은 여러분을 위한 나의 응원가라고 하며 함께 부르니 우리의 애국가가 불린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던 것이다. 애국가를 완성한 안선생은 사본을 만들어 미국에 있는 교민회에 보냈고 '한국환상곡'의 종악장에 합창으로 애국가의 선율을 삽입해 드디어 '한국환상곡'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1955년 조국을 떠난지 25년 만에 귀국해서 이박사 탄신 80주년 기념연주를 지휘했으나 그를 시기하는 일부 인사들의 모함으로 슬픈 가슴을 안고 한국을 떠났고 5.16 후인 1961년 다시 귀국 국제음악제를 창설 2회까지 지휘봉을 들기도 했다.


     그러나 말버릇처럼 조국에서 살겠다는 그의 염원도 아랑곳없이 조국은 그를 환영하지 않았고 그가 설 땅은 도무지 이곳에 없었다. 1965년 안선생은 영국의 뉴필하모니아 교향악단을 지휘하기 위해 부인과 두 딸을 데리고 영국에 건너가 자신의 작품인 「논개」와 「비창」교향곡을 성공리에 지휘했으나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어 급히 마요르카로 돌아왔으나 병세는 끝내 호전되지 않아 1965년 9월16일 3시15분 쓸쓸히 눈을 감으니 그의 나이 59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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