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야별 문화인물

박승희 (朴勝喜)
1901~1964 / 연극인
생애 및 업적
  •  박승희는 우리나라 근대연극에 절대적 기여를 한 인물이다. 만약에 그가 1920년대에 없었더라면 우리나라의 대중연극은 말할 것도 없고 본격 근대극도 그 토대가 약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만큼 박승희는 3.1운동 직후로부터 1930년대 초까지 이 땅에서 연극다운 연극이 있게끔 밀알의 구실을 한 선구연극인이었다. 사실 이 땅에서 연극이라는 예술 장르는 그의 문화적 공헌도와는 달리 하찮은 것으로 거의 도외시 되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화기 때까지도 연극은 예술로서 보다는 단순한 놀이로 취급되었고 그 극역인 배우는 광대로서 천대받았다. 수백 년에 걸친 이러한 연극과 배우에 대한 박대는 연극이 이 땅에서 고급예술로 자리 잡지 못하게 했던 가장 큰 요인이 된 것이다. 그에 따라 연극은 떳떳한 직업이 되지도 못했고 유능한 인재들이 연극계에 뛰어들지 않았던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사실 연극은 문학이나 미술 등 예술장르와는 다른 합동 창작물이라는 점에서 크게 차이가 난다. 아무리 좋은 문학작품을 써놓아도 뛰어난 배우 및 연출가나 견고한 극단이 없으면 그 작품성이 살지 못한다. 연극은 무대 위에서 그 진면목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렇게 되기까지는 창조자 여러 명이 힘을 모으고 경제적 뒷받침을 얻어서 이룩되는 것이다. 그만큼 연극은 극작가. 연출가, 배우, 무대미술가 등 다른 성격의 창조자들을 많이 필요로 하는 종합예술 형해이다. 바로 그 점에서 연극은 그 어느 분야보다도 유능한 인재와 경제적 뒷받침을 필요로 하는 특수 장르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천대받고 소외되어 가난한 삶이 눈앞에 보이는 연극예술에 유능한 인재가 모일 수 있겠는가.


     바로 그 점에서 박승희가 위대한 인물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즉 구한말의 왕족 다음 가는 명문가 자제인데다가 일본 유학이라는 배경까지 갖춤으로써 장래가 보장된 그가 연극운동이라는 가시밭길로 뛰어든 용기와 신념도 대단하지만 그것을 끝까지 지키느라 가산을 탕진한 그의 선구자적 삶은 높이 평가되고도 남음이 있다. 가령 1920년대 우리 연극의 대명사라 할 극단 토월회만 하더라도 순전히 그의 분신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토월회는 하나의 연극 단체였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토월회가 어려운 시대와 사회문화 여건 속에서 분열과 갈등, 이합집산을 수없이 거듭했어도 박승희만은 끝까지 극단과 운명을 같이 했다. 그의 의지로 극단이 조직되고 그의 가산으로 막이 올랐으며 그가 무대배우로서 또는 연출가로서 기획자로서 작가와 번역 번안가로서 레퍼토리를 제공하지 않았던들 토월회는 유지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토월회는 박승희 그 자신이었다.


     이 토월회야말로 3·1운동 이후 그러니까 1930년대의 극예술연구회와 동양극장이 등장하기까지의 과도적 역할을 한 전문 극단이었던 것이다. 아직 학예회 수준을 탈피 못한 소인극단들이 전국적으로 민족계몽운동을 펼치고 저급한 일본 신파극 답습의 상업극단들이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을 때 토월회가 나름대로 대중연극의 진로를 제시한 것만도 큰 공로라 말할 수 있다. 그 후견인 역한을 한 것이 바로 박승희라는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박승희는 연극운동가로서 뿐만 아니라 배우, 작가, 제작자등으로서 높이 평가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1920년대에는 그 말고도 현철이라든가 김우진 등이 있었으나 모두가 단명했고 박승희만이 자기 인생을 모두 연극운동에 바쳤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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