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야별 문화인물

백범 김구 (白凡 金九)
1876~1949 / 독립운동가
생애 및 업적
  •  백범 김구는 1876년(고종 13년) 음력 7월 11일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백범은 어린 시절 양반의 차별을 겪고 글공부를 하기 시작하였다. 소년시절 동학에 입도한 후 열심히 동학 경전 공부를 하고 포덕에도 힘썼다. 이때 이름을 창암으로부터 창수로 개명하였다. 백범이 얼마나 동학 포덕에 열성적이었는지, 입도한지 둘과 몇 개월 만에 포덕하여 얻은 동학 신도가 수백 명에 달하였다. 백범 김구의 최초의 정치적 사회적 활동은 동학당에 가입하여 활동한 것으로서, 동학혁명의 제2차 봉기에 참가해서 실패했으나 백범은 이 동학을 통해서 양반의 허위성과 평민의 훌륭하고 중요함과 평등사상을 깨달아 평생토록 이 생각을 간직하고 발전시키게 되었다.


     백범은 비교적 짧은 기간이었지만 고능선 선생으로부터 유학과 위정척사 사상의 강의를 듣고 심대한 영향을 받았다. 그는 뒤에 개화사상을 갖게 되었을 때에도 이때 청강한 '의리'의 귀중함을 지켰다. 일본인에게 시해당한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군 중위 쓰치다를 살해하고 체포되어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고종의 특사로 감형되었다. 신민회에 참가하고,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17년 형을 선고받았다. 복역 중 감형으로 1914년 출옥하여 김홍량(金鴻亮)의 동산평 농장 농감(農監)이 되어 농촌을 계몽하였다.


     3.1운동 후 상하이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고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령을 역임하면서 한국독립당을 조직, 총재가 되었다. 이후 결사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사쿠라다몬 저격, 상하이 훙커우공원 일본 왕 생일 축하 식장의 폭탄투척 등 이봉창, 윤봉길 등의 의거를 지휘하였다. 1940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옮길 때 이를 통솔하였고,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설치하고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선임되었다. 백범은 1946년(71세) 2월 1일 비상국민회의를 조직하고 2월 14일에는 민주의원을 조직한 후 총리에 취임하였다. 1947년에 비상국민회의가 국민의회로 개편되자 부주석에 취임했으며, 11월에는 유엔 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에 의한 정부수립 결의안을 지지하였다. 백범은 조국의 장기 분단과 내전을 막고 조국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김규식과 함께 1948년 4월 19일 평양으로 가서 '남북정당사회단체협의회'에 참석하여 남북협상을 마친 뒤 5일 3일 서울로 돌아왔다.


     백범은 지성껏 남북현상을 추구했으나 백범의 뜻과 같이 되지는 않았다. 백범은 1948년 8월 15일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한 단독정부로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이어서 9월 9일 단독정부로서 김일성의 북한 정진이 수립되자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하여 집에서 고전을 읽으며 칩거하였다. 그러나 1949년 6월 26일 친일매국노의 잔당들과 일부 권력 추구배들이 음모를 꾸며 안두희라는 하수인을 고용해서 일생을 오직 조국과 민족의 독립을 위해 바친 백범을 시해하였다. 일생을 모두 자기 민족과 조국에 바친 위대한 애국자이며 민족의 스승인 백범 김구 선생은 74세를 일기로 순국한 것이다. 백범은 광복 후 어지러운 정국 속에서 너무 억울하게 서거했지만 그의 위대한 애국정신과 독립정신은 한국민족 모두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있는 빛이 되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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