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조선 전기의 외교관으로 40여회에 걸쳐 일본에 통신사로 파견되어 667명의 조선포로를 찾아오고 계해조약의 체결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는 한편, 세종임금의 명을 받아 대장경을 일본 국왕에게 전달하고 일본의 자전(自轉) 물레방아를 도입하고 사탕수수 재배를 건의하는 등 조선-일본 문화교류에 큰 업적을 남겼다. 고귀한 장인정신, 지극한 효성, 불굴의 의
우현(又玄) 고유섭(高街燮)은 미학을 바탕으로 미술사(美術史)를 연구한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사가이다. 그는 한일합방이 되던 해인 1905년에 태어나 1944년 광복되기 한 해 전까지, 일제강점기라는 불운의 근대사 속에서 생애를 보냈다. 그의 생애와 학문은 한국미술사를 쓰기 위한 열망으로 집약할 수 있다. 그는 매우 이른 시기부터 '한국미술사'에
퇴계는 학문하는 목적을 입신양명에서 성현군자(聖質君子)가 되는데 두었다. 유학강령대로 수기치인(修己治人 : 자기 인격을 완성하고 남을 교화함)에 치중하여 위기지학(爲己之學)과 군자유(齋子儒)를 닦았다. 그는 공자 이래 성현 군자의 모든 가르침을 실험 실천하여 생활하기에 힘썼을 뿐 아니라 불가와 도가의 공부도 몸소 경험해서 허구(虛構 : 이단과 사
고산 윤선도는 1587년 (선조 20년) 음력 6월 22일, 한경(漢京) 연화방(蓮花坊)에서 출생하였다. 이곳은 지금의 서울 종로구 연지동이다. 그의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또는 해옹(海翁)이다. 가계(家系)를 보면 고산을 해남 윤씨의 시조 존부(存富)로 부터 16세손(世孫)이다. 전남의 해남사람으로 당대의 국부(國富)였고, 후에 호
1434년(세종16) 과거(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세종이 승하(1450년)하실 때까지 16년간 집현전에서 학문연구에만 전념하였으며, 특히 훈민정음[訓民正音(한글)] 창제의 주역 인물이었음. 또한 청백리(淸白吏)로 40년간 관직생활을 하였고, 부친의 거상시묘(居喪侍墓)살이 중 기복출사(起復出仕)의 왕명에도 불응하는 등 조선왕조 선비의 기개(氣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