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문화공감

[황광해의 한식읽기] 33. 해장국
어느 방송에 출연해서 ‘해장국’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방송 전, 대본을 정리하는 작가가 물었다. “우리 민족은 언제부터 해장국을 먹었을까요?”

해장국의 역사는 길지 않다고 설명했다. ‘100년 남짓?’ 믿지 않았다. 고려 시대 “노걸대(老乞大)”에 해장에 대한 기록이 있다고 주장했다. 고려 시대에 이미 해장, 해장국이 있었으니 해장국 역사는 천년을 넘겼다는 주장이다. “노걸대”는 고려, 조선 초의 ‘중국어 통역 교재’다. “노걸대”에는 해장(解醬)이 없다. 해정(解酲)은 있다. “이른 아침 일어나 해정(解酲)을 하고”라는 문장이다. 해장은 해정과 다르다. 해정은 해장의 시작도 옛 이름도 아니다.

네이버의 국어사전 내용이다.
 

해장하다: 解酲하다 [해ː장하다], 동사, 전날의 술기운을 풀다. 또는 그렇게 하기 위하여 해장국 따위와 함께 술을 조금 마시다.

해정하다: 解酲하다 [해ː정하다] 동사 ‘해장하다’의 원말.

 
‘解酲’은 해장이 아니라 해정이다. 해정의 ‘酲(정)’은 숙취다. 해정은, 숙취를 풀다, 숙취를 없앤다는 뜻이다. 술을 깨게 한다는 뜻이다. 해장과 해정은 다르다. 우리가 해정으로 쓰고, 해장이라 읽을 뿐이다. 사전에는 해정이 해장의 원말이라고 설명한다. 틀렸다.

흔히, ‘해장한다’ ‘해장하러 간다’ ‘해장술을 마셨다’ ‘해장국으로는 이런저런 음식이 최고다’라고 말한다. 해장은 흔히 해장국 마시는 걸 뜻한다.
 
소뼈 우거지 된장해장국
60년 이상의 업력을 지닌 해장국 노포의 해장국. 소뼈, 우거지, 된장국물이다. 

해정은 술을 깨우다, 숙취를 푼다는 뜻이다. 굳이 해장국이나 뜨거운 국물을 뜻하지는 않는다. 굳이 따지자면 해장, 해장국은 해정의 한 부분이다. 해정하는 방법의 하나가 요즘의 해장이다.

해장, 해장국의 역사는 불과 100년이다. 해정은 역사가 길다. 오랫동안 해정은 했지만 해장국을 마시지는 않았다. 고려 시대 “노걸대”뿐만 아니라 숱한 기록에 해정이 나타난다. 오래전 중국에서도 술을 많이 마시고 정신을 잃어버리는 이들이 많았다. 대표적인 인물이 진(晉)나라 사람 유령(劉伶, 221~300년)이다. 조선 시대 계곡 장유(1587~1638년)의 “계곡선생집”의 시다(제25권 오언고시).
 

평생토록 술 마시기 좋아했는데
해정주(解酲酒)로 자그마치 다섯 말의 술
그러나 언제고 술 담글 밑천 없어
항아리 술 채울 길 늘상 없었다오

 
해정, 해정주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중국이다. 유령은 죽림칠현(竹林七賢) 중 한 사람이다. 말술을 마셨다고 전해진다(世說新語, 세설신어).

중국 인터넷 사전 “바이두”에서는 “유령은 술로 이름을 떨쳤는데, 한번 술을 마시면 한 섬이요, 해정할 때 다섯 말을 마셨다[一飮一斛,五斗解酲, 일음일괵 오두해정]”고 전한다.

해정, 술 다섯 말 기록은 남아 있지만, 해장국을 먹거나, 해장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 계곡은 16, 17세기 조선 중기의 사람이다. 이때도 ‘해정’은 있었지만, 해장은 없었다. “바이두”에서는, 술로 생긴 병이 곧 ‘정(酲)’이라고 했다[酒病曰酲, 주병왈정]. 해정은 술병을 낫게 하는 것이다.

고려 시대, 조선 시대에도 술을 많이 마신 이들은 많았다. 숙취, 과음을 깨운, 해정의 방법도 여러 가지였다. 해장은 아니다. 해장국을 퍼마셨다는 기록도 없다.

목은 이색(1328∼1396년)의 “목은시고” 제1권에 실린 내용이다.
 

죽방을 열고 들어가 바람 부는 난간을 바라보며
포단을 펴서 가부좌를 하고
노아를 끓여 해정을 하였다네[烹露芽而解酲, 팽노아이해정]

 
술을 마셨다. 대나무 방에 들어가 가부좌를 한다. 밖에는 바람이 분다. ‘노아 차’를 끓여 숙취를 푼다. 해정의 도구는 ‘노아를 끓인 것’이다. 노아 차는 차 종류 중 하나다. 노아는 이슬 머금은 새싹이다. 차 등 식물의 여린 새싹으로 끓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펄펄 끓는 해장국, 해장탕은 아니다. 목은의 해장, 해정은 맑고 은은한 노아 차였다.

과일로 해정을 하는 경우도 잦았다. 삼탄 이승소(1422~1484년)의 “삼탄집” 중 포도에 관한 시다(제4권, 포도를 그린 족자 2수).
 

(전략) 바람 불고 비가 쳐서 산산조각 내놓아서
잎새 아래 주렁주렁 만 송이를 드리웠네
인간 돕는 삼절이야 비할 과일 없지마는
공로를 논하려면 숙취 깨게 한 것이 가장 크다네
[策勳多在解酲時, 책훈다재해정시]

 
앞에서는 포도를 설명한다. 인간에게 아주 유익한 과일이다. 그 공로 중에 가장 큰 것이 술을 깨우는 것이다. 포도가 해정의 도구였다.

고려 문신 이규보(1169∼1241년)도 과일로 해정을 했다. “서왕모에게서 훔쳐 온 복숭아로 입맛을 돌게 하거나 술을 깨게 한다(동국이상국전집)”고 했다. 복숭아 해정이다.

해장을 하기 위하여 또 술을 마시는 것은 해장술이다. 술을 깨우기 위해 또 술을 마시는 것은 얼핏 보면 모순이다. 이 모순은 오래전에도 있었다. 해장술, ‘해정주(解酲酒)’다. 해정주는 숙취, 술병을 이기는 술로 조선 시대 기록에도 자주 나타난다.

조선의 큰 유학자인 명재 윤증(1629~1714년)의 “명재유고”에도 해정주가 있다. 명재가 쓴 문인, 벼슬아치 백이 이석(1603~1685년)의 신도비명(神道碑銘) 중 일부다.
 

(전략) 일찍이 야대(夜對)에서 상이 술을 권하였는데
공이 저도 모르게 깊이 취하게 되었다.
나갈 때에 상(上)이 특별히 명하여 젊은 환관에게 부축해서 나가게 하고
한밤중에 또 해정주(解酲酒) 1병을 내리니,
당시 사람들이 특별한 대우라고 하였다. (후략)

 
‘야대(夜對)’는 늦은 밤, 임금이 숙직하거나 공부하는 관리를 만나 간단한 음식, 술을 나눠 먹고 마시는 일이다. 조선의 왕들은 늦은 밤, ‘비공식적으로’ 신하들을 만나 음식, 술을 나눠 먹으며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명재유고”의 기록에 따르면, 백이 이석과 야대하고 술을 권한 이는 효종이다. 1651년(효종 2년)의 일이다.

백이가 술에 깊이 취하자, 효종은 젊은 환관에게 백이를 부축하라고 명한다. ‘해정주’ 한 병도 별도로 보낸다. 술을 깨게 하는 술이다. 17세기 후반에도 ‘해장’이 아니라 ‘해정’ ‘해정주’였다.

해장, 해장국은 일제강점기에 나타난다. 근대적인 음식점, 주점들이 등장하면서 해장국은 시작된다. 조선 시대 내내 쇠고기는 금육(禁肉)으로 불렀다. 금지된 고기, 도축을 막았던 고기다. 조선이 무너지고, 근대적인 공업화, 상업화가 진행되면서 민간에서 자유롭게 운영하는 음식점들이 생긴다. 금육이 풀리자, 민간의 고기 소비도 늘어난다. 길거리의 크고 작은 음식점들이 쇠고기를 사용하여 ‘해장국’을 끓인다. 해장국의 시작이다. 해장국은 정육(精肉)이 아니라 허드레 고기, 피, 쉽게 구할 수 있는 배추 우거지, 무청 시래기 등으로 끓인다. 육수는 된장 푼 물이다.

해장은, ‘解醬’이다. ‘해(解)+장(醬)’이다. 속을 푸는 장국이다. 장국은 된장, 간장, 고추장 등 발효된 장을 넣고 팔팔 끓인 국물이다. ‘된장 등을 넣고 끓인 국물’이 해장국이다. 해장을, 인간의 장기를 풀어내는 국물[解腸]이라고 여기는 이도 있다. 그렇지는 않다. 여러 종류의 장(醬)을 넣은 국물이 해장국이다. 인간의 내장, 장기를 푼다는 뜻이 아니다. “술로 꼬인 인간의 장기를 풀어내는 것이 해장국”이라는 이야기는 틀렸다. 뜨거운 국물을 마신다고 꼬인 장이 풀리지는 않는다. 장이 꼬이면 병원에 가야 한다.

해장국은, ‘해정(解酲)+개장국[狗醬, 구장]’이라는 주장이 오히려 설득력이 있다. 해정은 오랫동안 숙취를 풀고 술병을 낫게 하는 것이라 여겼다. 개장국도 조선 시대 내내 상식했던 음식이었다. 주막의 단골 메뉴도 당연히 개장국이었다.
 
해장국(소,돼지 허드렛 부위,내장)
해장국에는 소, 돼지의 허드렛 부위 고기를 넣는다. 내장도 사용한다.

해장국의 출발은 ‘술국’이다. 술국은 불과 20~30년 전에는 널리 쓰였던 단어다. 술국은 술을 마실 때 한두 숟가락 떠먹는 국물을 말한다. 숙취, 술병에 먹는 해장국이 아니다. 술을 마실 때 먹는 국물이다.

한양 도성 혹은 경성의 아침이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양주, 양평, 파주 등에서 이른 새벽, 땔감을 지고 도성으로 오는 이들이 있다. 가난한 농부, 나무꾼들이다. 나무꾼들이 땔감을 내려놓는 곳이 바로 오늘날 종로 피맛골 부근이다. 새벽부터 길을 나섰다. 아침도 먹지 못했다. 허기가 진다. 막걸리 한 사발, 김치나 깍두기 한 보시기, 그리고 술국이다. 막걸리 한 모금 마시고, 신 김치를 욱여넣는다. 술국 한 숟가락을 떠넣고 삼킨다. 술국에 밥을 한 술 말아도 좋다. 해장국의 시작은 술국이다.

고깃국물은 대갱(大羹)이다. 귀한 정육(精肉)으로 수육을 만들면 고깃국물이 나온다. 귀하게 여겼고 제사에도 사용했다. 으뜸 국물이다. 큰 국물, 바탕 국물, 대갱이다, 허드레 고기도 버렸을 리는 없다. 먹었다. 국물도 먹었다. 다만 이름이 없었다.

일제강점기, ‘나물+된장 국물’이 ‘허드레 고기+나물+된장 국물’로 발전한다. 해장국의 시작이다. 우거지 등 채소를 넣고, 된장과 허드레 고기, 피를 넣은 국물이 시작된다. 저잣거리의 가게에서 이런 국물을 판다. 술국, 해장국의 시작이다.

서울 종로 피맛골 부근에 해장국, 설렁탕 노포가 많은 이유가 있다. 이 부근이 땔감, 나물의 시장이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문을 열었다. 처음부터 해장국 집은 아니었다. 술국을 내놓는, 일하는 이들을 위한 대중적인 식당이었다. 술국 집이 해장국, 설렁탕 전문점으로 바뀌었다.

1970, 80년대는 한국의 고도 성장기다. 술을 마시거나 요깃거리를 위해 술국을 찾는 이는 없다. 산업화가 진행되고, 우리는 ‘사회적 과음 체제’로 들어선다. ‘삼겹살+희석식 소주’는 직장인들의 교과서가 되었다. 맑은 차, 과일의 해정은 더 버티지 못한다. 술국도 사라졌다. 고깃국물, 생선탕, 짬뽕 국물의 ‘해장국 시대’가 되었다.

가끔 “외국에서는 어떤 해장국을 먹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없다. 차가운 우유, 바나나, 냉수 등을 외국의 해장, 해장국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렇지 않다. 해장, 해장국은 한반도 특유의 문화다. 해정, 술국이 해장국으로 변화했다. 그뿐이다.
 

필자 황광해는, 
경향신문 기자로 오랫동안 활동했으며, 현재 음식 칼럼니스트로 활약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한식을 위한 변명>, <고전에서 길어올린 한식이야기 식사>, <한국맛집 57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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