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화

<보리타작 노래[打麥行]>
새로 거른 막걸리 빛 우유처럼 뿌옇고 / 新篘濁酒如湩白
큰 사발에 보리밥 높이가 한 자로세 / 大碗麥飯高一尺
밥 먹고는 도리깨 들고 타작마당 나가서니 / 飯罷取耞登場立
검게 탄 두 어깨가 햇볕 아래 번들번들 / 雙肩漆澤翻日赤
호야호야 소리 내며 발 맞추어 두드리니 / 呼邪作聲擧趾齊
금방사이 보리 이삭 질펀하게 널려 있다 / 須臾麥穗都狼藉
주고 받는 잡가(雜歌) 소리 갈수록 높아지고 / 雜歌互答聲轉高
보이느니 지붕까지 보리겨 날아 튀어오르는데 / 但見屋角紛飛麥
기색들을 살펴보니 뭐가 그리 즐거운지 / 觀其氣色樂莫樂
마음이 육신의 노예가 된게 아니로세 / 了不以心爲形役
낙원과 낙교가 멀리 있는 게 아니거늘 / 樂園樂郊不遠有
뭐가 괴로워 고향 떠나 풍진의 객이 될 것인가 / 何苦去作風塵客
보리 수확은 이삭이 나온 후 35일 지난 망종(6월 5일경) 무렵이 최적기이다. 보리를 거두어들인 논에는 바로 모를 심어야 하기 때문에 타작은 모내기를 마친 다음에 한다. 보리타작은 도리깨로 보릿단을 내리쳐 낟알을 떨어뜨리는 작업으로 여러 사람이 노동요를 부르며 함께 작업을 했다. 떨어진 보리 낟알은 ‘보리드리기’라하여 쭉정이와 겨를 날려 보내는데 1801년(순조 1) 6월에 정약용이 지은 ‘보리타작 노래[打麥行]’이라는 시에는 이 모습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정약용은 농부들이 노동요(雜歌)를 주고받으며 보리타작하는 것을 보면서 농부들이야말로 벼슬살이하는 풍진의 객과 달리,《시경》에서 이상의 땅으로 노래했던 낙원(樂園)과 낙교(樂郊)에 거처하듯 힘든 노동에도 마음이 육체의 노예가 되지 않고 즐거워하고 있음을 부러워하고 있다.
이듬해인 1802년(순조 2) 봄, 유배지를 강진으로 옮긴 뒤 동문 근처의 주막에 거처하면서 강진의 농촌 풍경과 고을의 풍속을 소재로 지은 시로 농번기에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 농촌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어 화폐경제 발달로 인한 돈의 가치 상승에 따른 사람들의 세태 변화를 확인할 수 있는데 아낙네들이 품팔이에도 밥을 얻어 먹는 '밥모'보다 품삯으로 돈을 받는 ‘돈모’에 몰리는 현상이 드러나 있다.
<강진의 농가[耽津農歌]>
벼논에 물을 빼고 보리를 심었다가 / 稻田洩水須種麥
보리 베어 낸 즉시 모를 또 심는다네 / 刈麥卽時還挿秧
지력을 하루라도 놀리려고 아니하여 / 不肯一日休地力
사철 내내 푸른색 누른색으로 아름답지 / 四時嬗變色靑黃
집집마다 모품팔이 아낙네들 정신없어 / 秧雇家家婦女狂
보리 베는 남편일도 돕지 못한다네 / 不曾刈麥助盤床
‘거주민들은 자기 남편을 일러 반상(盤床)이라고 하였음’
이씨네 약속 어기고 장씨네에게 가는 것은 / 輕違李約趨張召
돈모가 밥모보다 더 낫기 때문이라네 / 自是錢秧勝飯秧
‘순전히 돈으로 품삯을 치르는 것을 돈모[錢秧]라고 하고, 밥을 제공하고 품삯을 그만큼 감하는 것을 밥모[飯秧]라고 하였음’
- 제작자
- (사)한국음식인문학연구원
- 집필자
- 박채린
- 발행기관
-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원연합회
- 저작권자
- 한국문화원연합회
- 분야
- 한식[음식]
- 이미지출처
- 한국민속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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