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문화사전

동지 팥죽
동지 팥죽 이미지

동지(冬至)는 일 년 중,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아지는 날이다.
이날은 음(陰)의 기운이 극도에 이르게 되어, 그동안 위축되었던 양(陽)의 기운이 다시 부활하는 시기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동지는 ‘작은 봄’이라는 뜻의 소춘절(小春節), 혹은 ‘작은 설’이라는 뜻의 소신정(小新正), 아세(亞歲) 등으로 불렸다(『서울잡학사전』). 설날에 떡국을 먹듯이, 사람들은 동짓날에 절식(節食)으로 팥죽을 쑤어 먹었다. 동짓날 먹는 팥죽에는 찹쌀가루로 새알 모양의 새알심을 만들어 넣고 꿀을 타서 먹었다.
그래서 다른 때 쑤어 먹는 팥죽과 구분하여 이를 특별히 ‘동지 팥죽’이라고 불렀다. 이처럼, 동짓날 팥죽을 쑤어 먹는 풍습은 아마도 중국에서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종늠(宗檁)이 쓴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는 공공씨(共工氏)의 못난 아들에 관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 전설에 따르면 공공씨에게는 못난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이 동짓날 죽어 역귀(疫鬼, 전염병을 일으키는 귀신)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아들이 살아생전에 붉은 팥죽을 무서워해서 동짓날 팥죽을 쑤어 각 방과 장독간, 헛간 등의 문짝에 뿌려 역귀의 침범을 물리쳤다는 것이다(『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하지만 팥죽을 문짝에 뿌리는 행위가 때로는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도 했던 모양이다. 『영조실록』에는 동짓날 팥죽을 문에 뿌리는 행위가 그 정도가 지나쳐서 영조가 이를 엄격히 금했다는 기사가 발견된다. 그럼에도 이후에 나온 문헌에서 이 같은 행위가 반복적으로 관찰되는 것으로 보아, 항간에서는 팥죽을 문에 뿌리는 풍습이 여전히 전승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풍연(趙豊衍: 1914-1991)이 쓴 『서울잡학사전』에도 이러한 광경이 묘사되어 있다. 그는 동짓날 사람들이 팥죽, 북어포, 청주 혹은 탁주를 차려놓고 터줏대감에게 싹싹 비는 모습을 그려내면서 이를 ‘동지 고사(告祀)’라 한다고 적었다. 또한 동짓날이면 어느 집에서나 팥죽을 쑤었는데, 그렇게 정성 들여 만든 팥죽을 대문에 ‘액막이’로 끼얹어서 팥죽이 벌겋게 얼어붙은 광경이 과히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고 술회하였다. 지금은 이런 행위를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지만, 조풍연이 살았던 근현대시기에도 이 같은 행위가 쉽게 근절되지 못했던 것은 팥죽을 뿌리는 행위가 담고 있는 벽사적 의미, 혹은 상징 때문이었으리라고 여겨진다. 어쨌거나 동짓날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팥죽으로 한 끼를 삼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고려 후기 학자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은 특히 팥죽을 좋아해서 『목은집(牧隱集)』에만도 팥죽에 관한 시를 여러 편 남겼다. 어느 동짓날 동지 팥죽에 꿀을 타서 먹고 난 목은선생은 팥죽은 음사를 다 씻고 뱃속도 윤택하게 해준다며 매우 흡족해했다. 그러면서 팥죽을 먹으면 오장을 깨끗이 씻어내고 혈기가 조화를 이루어 평온해진다고 적고 있다. 또한 팥죽은 부드럽고 감미로운 맛 때문에 종종 우유나 연유에 비유되기도 했다(『상촌집(象村集)』).

똑같은 두죽(豆粥)이라 해도, “자기 자식에게는 팥죽 주고 의붓자식에겐 콩죽 준다”는 속담이 괜히 생겨나지는 않았을 터. 조풍연이 살았던 시대에도 동짓날에는 대부분 동지 팥죽을 먹었다. 만일 집이 아주 가난하여 팥죽을 못 쑤는 사람에게는 형편이 좀 나은 집에서 팥죽을 쒀서 덜어 보내는 관습이 있었다고도 한다. 또한 그즈음에는 서울에 붙박이로 팥죽만 쑤어 파는 집이 많았는데, 특히 종로 5가 동대문 시장에 있는 팥죽집이 언제나 사람들로 성황을 이루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 무렵에는 서울 인심이 박해져서 새알심 값을 따로 받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새알심 대신 인절미를 넣은 팥죽을 팔기도 하고, ‘단팥죽’이라 하여 일본식 팥죽이 청소년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다고 하였다(『서울잡학사전』).

제작자
(사)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집필자
양미경
발행기관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원연합회
저작권자
한국문화원연합회
분야
한식[의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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