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문화사전

추탕(서울명물 형제주점)

식민지시기였던 1920년대 말 동대문 밖 신설동 경마장 옆인 숭인동 199번지에 선산 김씨 다섯 형제가 가게를 열기 시작한 것이 형제주점의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상호도 없이 청계천 지류 미나리꽝에서 미꾸리를 잡아다 만든 추탕이 유명해져서 상호 역시 ‘유명추탕’이 되었고 동시에 술과 안주도 팔게 되면서 ‘형제주점’이라는 상호도 같이 내게 되었다.(주영하, 2011) 형제주점은 추어탕집으로서 뿐 아니라 서민들의 술집으로서도 매우 각광 받았기에 신문기사 등에도 주변에서 어떤 일이 생길 경우 형제주점 주변이라는 표현을 쓸만큼 동대문 주변의 랜드마크였다. 그리고 해방 이후에도 그 명성을 이어갔다. 그래서 그만큼 많은사람들 서울의 유명했던 술집 하면 형제주점을 떠올렸다.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초대 학장을 지낸 한구동(韩亀东: 1908-2000)도 <경향신문>에 일본에서 내빈으로 초대한 학자와 함께 형제주점에 갔던 기억을 기고한 적이 있다. 한구동의 기억에 따르면 당시 형제주점은 고기, 생선을 갖은양념을 해서 재어 놓은 안주가 얼마든지 있어 1인당 1원에 술만 사면 안주는 무제한이었기에 만취할 수 있었고 그 안주들을 숯불에 직접 구워 먹는 맛이 기가 막혔다고 한다. 형제주점은 가게가 유명했던 만큼 지역에 재해가 있을 때 지역 내에서 기부활동도 펼쳤다. 예를 들면 형제주점은 1938년 8월 중랑천 하천이 범람으로 청량리 일대가 물난리가 났을 때 조선중앙일보 경동지국과 협력하여 쌀 3섬을 가지고 이재민들에게 밥을 나눠줬다. 또 1958년 9월 당시 물난리를 겪고 초등학교에 있던 이재민들에게 전달하도록 도시락 1100개를 경향신문사로 보내기도 했다. 일찍부터 지역에서 명성과 덕망을 쌓아서였을까. 다섯 형제 중 누구의 아들인지 알 수는 없지만 “형제주점의 둘째 아들”이라는 김수길(金壽吉)이 민주당 소속으로 1956년 8월 첫 지방자치선거에 서울시 시의원으로 출마한다. 비슷한 시기인 동대문경찰서에서 1956년 8월 2일 형제주점에 대해 30일간 영업정지 처분내리는데 그 이유가 밥에 20% 이상 잡곡을 섞지 않았고 생선을 보관하는데 쓰인 얼음이 천연빙이었으며 종업원들이 위생복을 입고 있지 않았다는 점을 문제 삼은 것이다. 이에 김수길은 경찰의 처분이 공정하지 못함을 지적하면서 다시금 행정처분을 문제 삼았고 각 신문에서도 김수길이 당시 야당인 민주당 출신 후보자여서 영업정지를 내린 것이 아니냐는 문제 제기 했다. 결국 며칠 뒤인 8월 7일 형제주점에 대한 영업정지 기간이 10일 간으로 단축되었다. 이후 김수길은 4.19혁명 이후 경기도 산업국장까지 지냈으나 5.16 군사쿠데타 이후 정계를 떠났다고 한다. 1963년 서울의 명물이라 불리던 형제주점 역시 건물을 판다는 기사가 나왔고 얼마 뒤 실제로 문을 닫는다. 형제주점의 막내가 1989년 미아3거리 뒷골목에 사라져가는 서울식 추탕을 계승하기 위해 다시금 추탕집을 냈다.

제작자
(사)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집필자
이민재
발행기관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원연합회
저작권자
한국문화원연합회
분야
한식[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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