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문화사전

제사음식

유학과 성리학을 가장 중요한 철학으로 여겼던 조선시대 선비들은 효(孝)의 실천으로 조상을 기리는 제사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양반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집집마다 제사를 지냈다. 살림이 넉넉한 양반은 집 안에 사당을 따로 마련하여 조상의 위패를 모셨다. 위패는 돌아가신 분의 혼을 대신하는 것으로 돌아가신 분의 이름과 돌아가신 날짜를 적은 나무패로 신주라고 부른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제철 음식으로 제사상을 차려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설날 한식 단오 추석 같은 명절에도 제사를 드렸다. 돌아가신 날에도 제사를 지내는데 이를 기제사라고 부른다. 기제사의 제사 담당자는 집안의 종손이다. 이 종손은 자신을 기준으로 그의 돌아가신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의 기제사를 반드시 모셨다. 그 윗대의 조상은 10월에 묘소로 가서 제사를 올렸다. 높은 벼슬에 올랐다가 돌아가신 분에게는 후손들에게 계속 제사를 모시라고 나라에서 토지를 주기도 했다. 이러한 분들의 제사는 불천위 제사라고 불렀다. 조선 중기의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이 쓴 『미암일기(眉巖日記)』를 보면 증조부 제사를 지내는데 전라도 진도 군수가 도와주었다고 했다. 관청에서 개인의 조상 제사에 들어가는 경비를 지원해준 것이다. 일기에 나오는 제사음식은 정과 산자 약과를 비롯하여 떡 과일 고기 전유어 전복 계란 국수 물김치 무김치 술 등이다. 꽃꽂이와 촛대도 한 쌍씩 올라갔다. 제사의 제물은 돌아가신 분에게 올리는 음식이지만 보통 사람이 먹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생전에 먹던 음식을 기본으로 차렸다. 그래서 조상의 위패 바로 앞에 밥과 국, 수저를 놓는다. 밥과 국 앞에는 고기와 생선으로 만든 음식을 차렸다. 잘 차린 잔칫상을 조상에게 올리는 셈이다. 간장과 김치, 젓갈류와 나물도 빠뜨리지 않았다. 물론 김치는 고춧가루를 넣지 않은 것이었다. 맨 앞줄에는 과일과 과자, 떡을 높이 쌓아 올렸다. 혼령이 식사를 하면서 술을 마시고 숭늉으로 입가심을 하도록 술과 숭늉도 올렸다. 주자(朱子)의 『가례(家禮)』와 이재(李縡: 1680-1746)의 『사례편람(四禮便覽)』에 제사음식의 상차림 도식이 나온다. 이 도식이 기준이지만 집안마다 제사음식의 종류와 상차림 방식은 조금씩 다르다. 제사를 모시고 나면 참석자들은 제사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이것을 음복(飮福)이라 부른다. 음복을 통해서 제사에 참석한 사람들은 제사에서 모신 조상과 연결된다. 17세기까지만 해도 남녀 후손들이 번갈아가며 제사를 모셨다. 올해 큰 숙부 집에서 제사를 모시면, 내년에는 큰 고모 집에서 제사를 모시는 식이었다. 당연히 유산도 남녀 후손들이 골고루 나누었다. 하지만 18세기 이후가 되면 오직 집안의 맏아들에서 맏아들로 내려오는 종손만이 제사를 모시게 되었다. 제사에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아서 집안의 제사를 책임진 종손이 토지와 돈을 관리하였다.

제작자
(사)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집필자
주영하
발행기관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원연합회
저작권자
한국문화원연합회
분야
한식[의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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