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문화사전

자라탕

자라로 끓인 자라탕은 지금은 먹는 일이 드물어졌지만, 조선시대에는 흔하게 먹었던 음식이다. 자라는 탕 이외에도 찜이나 구이로도 먹었는데, 냇가에서 자라를 직접 잡기도 하고 어부가 잡은 것을 사서 조리하기도 했다. 그중 자라탕은 ‘별탕(鼈湯)’, ‘왕비탕’, ‘자라갱’, ‘자라국’이라고도 했고, 그 조리법은 장계향(張桂香: 1598-1680)의 『음식디미방』을 비롯해 조선시대 여러 문헌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가운데 『음식디미방』에 따르면, 자라탕은 연한 자라를 골라 먼저 머리를 잘라 피를 빼 낸 후 끓는 물로 씻은 다음 파, 청국장, 물을 부어 익힌다. 그런 다음 자라를 꺼내 살을 발라내고, 갖은 양념하여 버무려 두었다가 다시 끓여 만든다. 또는 자라를 산채로 끓는 물에 넣어 익힌 후 꺼내어 찢어 국을 끓이는 방법도 있다. 살아있는 자라를 물에 넣어 바로 끓이는조리법도 있었지만, 이 방법은 만들거나 먹으면서도 꺼림칙하게 여겼던 듯하다. 이용기(李用基: 1870-1933)의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1936) ‘자라탕[鼈湯]’을 보아도, 이 방법을 설명한 뒤 사람들은 자라가 죽을 때 불 때는 사람을 원망하여 그 사람 쪽으로 주둥이를 두고 죽는다고들 하지만 이는 자라가 자기를 죽이는 사람을 원망해서 그러는 게 아니고 뜨거움을 견디지 못해 물이 덜 끓는 쪽으로 향하다 죽기 때문이라고 풀이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끓인 자라탕을 먹은 조선시대 이민구((李敏求: 1589-1670)는 자라를 보내준 지인(知人)의 깊은 정에 탄복하며 시를 쓰기도 했다. 『동주집(東州集)』에 실린 시의 내용을 보면, 그는 “자라의 등껍질을 떼어 내고 솥에 조리하니 금처럼 진귀한 음식을 맛보았다”고 표현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이민구는 1609년(광해군 1) 진사시와 1612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서 장원을 차지할 정도로 재주가 많은 사람이다. 또한 명문가 출신이어서, 그의 집안은 조선 왕실의 후예로서 조부는 물론 부친 이수광은 판서를 역임하였고 맏형 이성구는 영의정에 오를 정도였다.(정만호, 2015) 이런 가문에서 유복하게 살아온 그가 자라를 받고, 그것으로 끓인 자라탕을 이토록 칭찬한 것은 단지 보내준 사람에 대한 감사함만은 아니며, 자라탕이 당시에 그만큼 귀한 음식으로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자라탕은 조리할 때 주의할 점이 몇 가지 있는데, 먼저 빙허각 이씨(憑虛閣 李氏: 1759-1824)의 『규합총서(閨閤叢書)』를 보면 자라 중 세 발을 가진 것은 독이 많으니 먹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빙허각 이씨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보감녹』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에 따르면, 발이 세 개인 가진 자라는 독이 심한데, 어떤 청나라 부부가 발이 세 개인 자라를 먹고 자다가 피를 많이 흘렸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가 조선에도 전해지면서, 세 발 가진 자라를 먹지 말라는 금기가 생겨난듯하다. 또한 이용기는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서 자라는 잘 무니까 조심해서 조리해야 하고, 쓸개가 터지면 국 맛이 써지니 자라탕을 끓일 때는 쓸개를 떼어내라고 했다. 그리고 최한기(崔漢綺: 1803-1879)의 『농정회요(農政會要)』에서는 자라탕은 탕 중에 진품(珍品)이라 할 수 있지만, 식으면 비린내가 나서 먹기 어려우므로, 남은 것을 다시 먹을 때에는 다시 끓여 먹어야 한다고 했다. 또한 자라탕을 먹을 때 비름나물과 미나리는 함께 먹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이와 다른 의미에서 자라는 조심해서 먹어야 하는 동물이었다. 영험한 힘을 가졌다고 믿어졌기 때문이다. 『보감녹』에서 보듯이, 자라는 배에 왕(王) 자가 있어서 다르게 여겨졌고, 살려 주면 은혜를 갚는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이와 반대되는 이야기가 이기(李墍: 1522-1600)의 『송와잡설(松窩雜說)』에 나온다. 안당(安瑭: 1461-1521)의 집안이 자라의 요변(妖變)으로 풍비박산이 났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정승까지 올랐던 안당은 평소에 자라를 먹는 것을 좋아하여, 어부에게서도 구하고 자라를 선물 받아서도 먹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동전 크기의 작은 자라가 수없이 많이 그의 집의 뜰에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 수가 도저히 다 쓸어낼 수 없게 많아서, 뜰에 독을 두고 자라를 넣었다가 독이 가득 차면 강에 들고 가 놓아줄 정도였다. 그 일이 있고 1년 뒤에, 공의 아들 안처겸(安處謙: 1486-1521)과 안처근(安處謹: 1490-1521)이 여러 대신(大臣)을 살해하려 했다는 모함을 받아 처형을 당하였고, 이에 연좌되어 안당 역시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제작자
(사)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집필자
김혜숙
발행기관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원연합회
저작권자
한국문화원연합회
분야
한식[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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