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문화사전

양파
양파 이미지

양파는 외떡잎식물로 백합목 백합과의 두해살이 풀이다. 양파는 현재 한국정부에서 가격과 생산량 수급에 큰 관심과 정책을 시행하고 있을만큼 중요한 채소 중 하나이다. 하지만 양파가 한반도로 들어온 때는 약 1세기 남짓되었을 뿐이다. 그만큼 양파가 한반도 내에 급속히 보급되고 시기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개항장이 열린 19세기 말 이후로 추정된다. 1905년 조사된 한국토지농산 조사보고-경기도 충청도 강원도 편에 따르면 인천 내 시장에서 나가사키산 양파를 1관(貫)에 27전, 홋카이도산 양파는 1관에 32전에 에 팔았다는 자료가 있다. 이를 통해 적어도 한반도에 양파가 수입된 시기는 1905년 이전으로 추측할 수 있다.(고바야시 후사지로 나카무라 히코 저, 농업진흥청 역, 2009) 양파의 명칭은 다양하고 변화도 많았다. 20세기 초 표기방식으로 보면 일본어 표기인 옥총(玉葱), 총두(葱頭) 그리고 다마네기로 많이 표기했다. 양파라는 표기도 등장하지만 식민지시기에는 일본어 표기가 좀 더 많이 쓰였다. 그 외에 파와 연관성을 고려하여 양파의 형태적 특징을 살린 둥근파 또는 서양에서 들여온 파라는 의미의 양총(洋葱) 등으로도 표기했다. 해방 이후 한국어를 ‘바르게’ 쓰자는 취지에서 왜색(倭色)표현을 지양하는 운동이 정부 민간 가리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뤄졌다. 그 가운데 양파를 뜻하는 다마네기도 대표적인 예로 자주 거론됐다. <동아일보> 1972년 11월 21일 기사에 따르면 서울시 차원에서 시내 각 요식업소 메뉴와 그릇에 “왜색표시”를 한국어로 고쳐 쓰도록 지시하고 향후 강력한 지도를 한다고 공표했다. 그리고 요식업소에서 고쳐서 표기해야 하는 대표적인 예로 다마네기를 들면서 이를 양파로 수정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하지만 1980년대까지 관련 신문기사들을 보면 여전히 일상생활 속에서 다마네기라는 표현을 많이 쓰고 있고 이를 고치자고 주장하는 글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한반도에서 양파 재배가 이른 시기 도입되었고 한국 내 양파 보급에 진원지와 같은 역할을 한 곳은 경상남도 창녕군 지역이다. 일본 내에서 재배하던 양파 품종이 창녕에 처음 도입된 시기는 1910년을 전후로 한 시기로 해방 이전에 시험적 재배가 이뤄졌으나 양파에 대한 수요가 적어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창녕의 양파 재배가 본겨화 된 시기는 해방 이후로 마산 대구 등 도시 지역에서 양파에 대한 수요가 생겨나면서 양파 재배 역시 주수홍 조성국(曺星國: 1919-1993) 등을 중심으로 조금씩 활성화 되었다. 이후 무형문화재로서 활동도 했던 조성국은 당시 농업학교 교사로서 1946년 마산에서 구해온 양파를 모구(母球)로 해서 양파 씨앗을 받기 위해 노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1946년 양파 씨앗을 구하기도 어려웠고 구한다고 해도 한홉에 당시 쌀 2말 값으로 거래될 만큼 양파 씨앗이 비쌌다. 이 같은 씨앗 문제는 양파 재배에 큰 장애물이었고 씨앗을 채종할 수 있어야만 보다 넓고 많이 양파를 재배할 수 있었다. 여러 번의 실패 끝에 조성국은 기름종이로 비가림막을 설치를 통해 양파 씨앗을 받는데 성공한다.(이종태, 2015) 창녕군 양파 재배에 또한 빠질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성재경이다. 성재경(成在慶: 1916-1980)은 창녕군 석리 출신으로 한국전쟁 이전에는 서울에서 출판사를 운영했지만 한국전쟁 이후 귀향하여 양파 재배에 처음 도전했다. 소위 “백면서생”이었던 그가 1952년 900평의 논에 양파를 심어 3,000관을 수확했는데 당시로서는 보리 390여 석에 달하는 가격이었다. 이 같은 성공에 다른 사람들도 크게 영향을 받아 양파 재배는 더욱 빠르게 창녕군 내에 보급되었다. 성재경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창녕 내 농민조직인 경화회(耕和會)를 창설하고 1968년 창녕군 양파 협동조합 설립하는데 중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내무부 행정과 진흥계, 1969) 물론 제주도, 무안군 일대에서도 식민지시기 이후 양파 재배가 도입되고 있었지만 1970년대 까지 한국 최대 양파 생산지로 유명했던 곳은 창녕군이었다. 신문 지면 상에도 이 같은 흐름이 반영되어 <매일경제> 1966년 8월 11일 기사에는 창녕산이 가장 질이 좋다고 평하면서 서울에 들어오는 양파의 대부분이 창녕산이라는 내용의 기사가 등장했다. 창녕 양파에 대한 중앙정부의 관심도 뜨거워서 <매일경제> 1973년 10월 15일 기사에는 농수산부가 창녕군을 양파단지로 조성, 기술 지원 및 행정지도를 강화하기로 했다는 기사 존재 창녕군 내 12개 단위 조합을 주축으로 참여 농가 2200호를 주축으로 양파단지 조성하고 1천톤 이상을 일본 등지에 수출할 계획이라는 보도도 나왔다. 창녕 양파 재배가 활발해졌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한국 내 양파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는 의미이고 양파를 요리에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되었음을 의미한다. 우선 양파는 요리에서 주재료 보다는 부재료로 많이 쓰이는 식재료 중 하나이지만 해방 이후 출판된 한식 관련 요리책 중에는 양파를 주재료로 만든 하는 조리법들도 종종 등장한다. 대표적인 예가 1946년 출판된 조선음식 만드는 법에 소개된 “옥총전”이다. 이 요리는 큰 “둥근 양파” 2개를 “한푼”에서 “한푼반” 두깨로 써는데 꼬치로 꿴 상태로 썰어 마치 산적처럼 만든 후 밀가루를 묻이고 계란옷을 입혀 구어 먹는 요리이다. 1948년 출판된 우리음식도 양파를 주재료 한 “양파 통찜”을 소개하는데 이 요리는 양파 속을 파낸 후 양념한 고기를 넣어 간장과 물을 담은 냄비에서 찌는 요리이다. 이와 같이 양파는 도입 재배 된지 반세기만에 한반도 식문화 속으로 점차 편입되었고 그 경향성은 앞서 본 양파 재배의 보급과 비슷하게 매우 폭발적으로 확산되어 양파 가격의 변화에 국가와 국민 모두 촉각을 곤두세울 만큼 한국에서 보편적 식재료가 되었다.

제작자
(사)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집필자
이민재
발행기관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원연합회
저작권자
한국문화원연합회
분야
한식[식재료]
이미지출처
한국민속대백과사전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 이용금지+변경금지 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빠른 이동 메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