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화

꿀을 넣었다 하여 ‘약(藥)’자가 붙은 약과(藥果)는 ‘밀면(蜜麪)’이라고도 했다.
조선시대 전국 어디에서나 만들어졌던 음식이지만, 특히 경기도 수원(水原) 지역의 약과가 맛이 각별하다 하여 명성이 높았다.
이러한 수원 약과는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목민심서(牧民心書)』를 보면 조선 전역에 유명했고, 인조(仁祖: 1595-1649, 재위 1623-1649)가 특별히 찾았던 음식이기도 하다.
인조가 병에 걸려 있을 때, 궁중의 주방[御廚]에는 입에 맞는 것이 없어서, 환관(宦官)을 시켜 수원 약과를 구해 오도록 보냈다. 당시 수원 부사(水原府使)는 조계원(趙啓遠: 1592-1670)이었다. 하지만 그는 주부(州府)에서 약과를 사사로이 헌납하는 것은 신하로서 임금을 섬기는 예(禮)가 아니라면서 조정의 명령이 아니면 안 되겠다고 답변했다. 그 말을 들은 인조는 비록 군신(君臣)의 사이이기는 하나 인척(姻戚)으로 얽힌 사이인데 어찌 그러한 인정조차 없냐며 웃었다고 한다.
인조가 인척의 인정을 언급한 것은 조계원의 형인 조창원(趙昌遠: 1583-1646)이 자신의 장인이었기 때문이다. 조창원의 딸이 바로 인조의 계비(繼妃)였던 장렬왕후(莊烈王后: 1624-1688)였으니, 수원부사 조계원이 사가(私家)로 치면 인조의 처 작은 아버지인 셈이다. 따라서 혼인으로 맺어진 인척이라 한 것이고, 조카사위인 자기에게 약과를 두고 깐깐하게 군 조계원의 처사에 박정하다고 인조가 한마디 한 것이다.
수원 약과는 일반 약과와 만드는 재료와 방법이 거의 유사하다. 다만, 서유구(徐有榘: 1764-1845)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약과방(藥果方)에서 설명하였듯이 반죽을 치댈 때 잣가루, 후춧가루, 계피가루, 볶은 참깨를 넣는 것이 다르다. 이렇게 만든 수원약과는 최영년(崔永年: 1859-1935)의 『해동죽지(海東竹枝)』를 보면, 특히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1762)의 원찰(願刹)인 용주사(龍珠寺)에서 약과를 훌륭하게 잘 만들었는데, 품질이 아주 좋아서 능침(陵寢)의 제사음식으로 바쳤다고 한다. 용주사가 두부를 비롯하여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顯隆園)의 제물(祭物)을 공급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사찰임을 고려하면, 용주사의 약과가 현륭원의 제사에 쓰였음을 알 수 있다.
- 제작자
- (사)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 집필자
- 김혜숙
- 발행기관
-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원연합회
- 저작권자
- 한국문화원연합회
- 분야
- 한식[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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