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화

사치스럽고 최고급으로 꼽히는 약과는 밀가루에 기름과 꿀을 섞어 반죽하여 모양을 만들어 기름에 지져 꿀에 즙청한 과자로 유밀과(油蜜果)라고 한다. 이규경(李圭景: 1788-1863)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1850)와 이수광(李睟光: 1563-1628)의 『지봉유설(芝峰類說)』(1613)에서 유밀과는 귀한 음식으로 평가를 받았다. 그 재료인 밀은 춘하추동을 거쳐서 익기 때문에 사시(四時)의 기운을 얻어 정(精)이 되고, 꿀은 백약(百藥)의 으뜸이며 기름은 살충하고 해독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유밀과는 고려시대부터 불교행사인 연등회‧팔관회에 사용되면서 중요한 제사음식 중 하나였으며 잔치음식 또는 진상품으로도 쓰였고 혼례 때 납폐음식이기도 했다. 유밀과는 제찬에 쓰는 과일이 없을 때 이를 대신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황필수(黃必秀: 1842-1914)의 『명물기략(名物紀略)』(1870년경)에 의하면 유밀과는 본디 밀가루와 꿀을 반죽하여 제사의 과실을 대신하기 위하여 대추, 밤, 배, 감과 같은 과실의 모양으로 만들어 기름에 익힌 조과 또는 가과(假果)이지만, 이것이 둥글기 때문에 젯상에 쌓아 올리기 불편하여 방형(方形)이 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왕이나 왕세자의 혼례에서 빈의 부모에게 보내는 예물 중에는 유밀과라는 과자가 포함되었다. 약과(藥果), 홍 백요화(蓼花), 행인과(杏仁果), 양면과(兩面果) 등 다섯 가지의 유밀과로 이를 오성유밀과(五星油蜜果)라 하였다. 신참들은 고참이나 상관장들에게 술상, 음식상을 극진하게 대접해야 하는데, 그때 음식 또는 안주로 ‘유밀과(油蜜菓)’를 애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 쓴 『필원잡기(筆苑雜記)』에서 사간원의 서리들이 근무 중인 관원들에게 유밀과 상을 풍성하게 차려 받드는 일이 관행이었다고 기록하였다. 고려시대부터 발달해 온 유밀과는 호화로운 재료 덕에 곤욕을 겪기도 했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따르면 1192년 고려 명종 때 사치스러운 사회 분위기를 바로잡기 위해 유밀과 대신에 과일을 올리라는 명령을 할 만큼 유밀과는 매우 사치스러운 음식을 대표하였다. 공민왕 2년(1353)에도 유밀과의 사용 금지령이 내렸다는 기록이 보인다. 유밀과가 기름, 꿀 등 값비싼 재료를 사용하는 사치스런 음식임에도 얼마나 성행했는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런 논쟁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진다. 명종 8년(1553)때 음식의 사치로 상제(喪祭)나 혼인(婚姻)에는 반드시 유밀과(油蜜果)를 쓰고 지나치게 높고 크게 만든다며 사치 풍조가 날이 갈수록 심해져 수습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며 유밀과의 금지를 논의했다. 유밀과 중에는 약과가 대표적이다. 크기에 따라 대약과, 소약과가 있으며, 반죽을 네모 모양으로 썰어 만든 것을 모약과라 한다. 반죽을 다식판에 박으면 다식과(茶食果), 행인(살구씨)모양으로 만들면 행인과(杏仁果), 대추를 곱게 다져 소로 하여 만두처럼 빚으면 만두과(饅頭果)이다. 약과 반죽을 갸름하고 길게 만들면 중박계(中朴桂) 또는 중계(中桂), 중배기라 한다. 그 밖에도 유밀과 종류로는 요화(蓼花), 한과(漢果), 매작과(梅雜果) 또는 타래과, 차수과 등이 있다.
- 제작자
- (사)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 집필자
- 이소영
- 발행기관
-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원연합회
- 저작권자
- 한국문화원연합회
- 분야
- 한식[음식]
- 이미지출처
- 한국민속대백과사전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 이용금지+변경금지 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