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화

앵두나무의 열매인 앵두는 맛도 맛이지만 동그랗고 붉은 모양이 예뻐서 더욱 사랑받는 과일이다. 앵두는 한자로는 ‘櫻桃’(앵도)라고 표기하는데, 이밖에도 여러 명칭이 있다. 『광재물보(廣才物譜)』 4권에 따르면, 앵두는 ‘이슬앗’, ‘鸎桃’(앵도), ‘含桃’(함도), ‘荊桃’(형도), ‘楔子’(설자), ‘崖蜜’(애밀), ‘朱櫻’(주앵), ‘紫櫻’(자앵), ‘蠟櫻’(납앵), ‘櫻珠’(앵주), ‘麥英’(맥영), ‘朱茱’(주수)라고도 했다. 이러한 앵두의 명칭에 대해서는 최한기(崔漢綺: 1803-1879)의 『농정회요(農政會要)』를 보면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앵두를 복숭아 ‘桃‘(도) 자를 써서 ’櫻桃‘(앵도)라 한 것은 앵두의 모양이 복숭아와 닮아서이고(『본초연의(本草衍義)』), 그 열매가 구슬[瓔珠]과 같으므로 ’櫻‘(앵)’이라고 하였다(『강목(綱目)』)고 한다. 또한 ‘鶯桃’(앵도)와 ‘含桃’(함도)는 꾀꼬리[鶯]가 먹는 것이기 때문에 붙은 명칭이며(『설문(說文)』), 빛깔에 다라 앵두 중에서 진홍색인 것을 ‘朱櫻’(주앵), 자주빛 껍질 안에 작은 점이 있는 것은 ‘紫櫻’(자앵), 밝은 정황색(正黃色)은 ‘蠟櫻’(납앵), 작고 붉은 구슬 같은 것은 ‘櫻珠’(앵주)라고 한다고 했다.(『비아』), 그밖에 『이아(爾雅)』에서는 ‘楔’(설), ‘荊桃’(형도), 앵두 중에 가장 크고 단 것은 ‘崖蜜’(애밀)이라고 하고, 『박물지(博物志)』에서는 ‘牛桃’(우도), ‘英桃’(영도), 『선부록(膳夫錄)』에 나오는 ‘吳櫻桃’(오앵도), ‘水櫻桃’(수앵도)라는 명칭도 보인다. 이러한 앵두를 두고 조선시대의 미식가라 할 수 있는 허균(許筠: 1569-1618)은 『도문대작(屠門大嚼)』에서 저자도(楮子島)(지금의 서울특별시 강남구에 위치했던 섬)에서 나는 것이 작은 밤톨만한 크기여서 크고 맛있고, 영동(嶺東) 지방에서는 흰 앵두가 많이 나지만 맛이 붉은 앵두만은 못하다고 평했다. 조선시대 앵두는 음력으로 5월 5일인 단오(端午) 때가 한창이어서, 왕실과 민간에서는 5월이 되면 새로 나오는 제철식품으로 앵두를 천신(薦新)하였다. 그리하여 유중림(柳重臨: 1705-1771)의 『증보산림경제』에서는 과일 중에서 가장 먼저 익는 것이 앵두이니 사당(祠堂)에 천신할 수 있도록 반드시 좋은 종자를 골라서 울타리 사이에 많이 심으라고 하였다. 왕실에서도 5월에는 장원서(掌苑署)에서 마련한 앵두를 종묘(宗廟)와 경모궁(景慕宮) 등에 천신하였고,(『종묘의궤』, 『경모궁의궤』) 각 전(殿)에 진상하였으며 잔치음식이나 관리 등에 대한 하사품으로 썼다. 중종(中宗: 재위 1506-1544)도 승정원 홍문관 예문관과 같은 관청에 앵두를 하사한 일이 있다.(『중종실록』 중종 7년 1512년 윤5월 3일 기사) 한편 경복궁의 동궁(東宮)에 많이 있는 앵두나무는 이유원(李有源: 1763-1835)의 『임하필기(林下筆記)』에서 보듯이, 효성이 지극했던 문종(文宗: 재위 1450-1452)이 앵두를 좋아하는 아버지 세종(世宗: 재위 1418-1450)을 위해 손수 심고 가꾼 것이라 한다. 앵두가 익기를 기다렸다가 문종은 세종에게 앵두를 따서 올렸는데, 이 앵두를 맛 본 세종은 외부에서 올린 것이 어찌 세자가 손수 심은 것과 맛이 같을 수 있겠느냐며 맛있어했다고 한다.(『문종실록』 문종 2년 1452년 5월 14일 기사) 이를 두고 심정(沈貞: 1471-1531)은 중종(中宗: 재위 1506-1544)에게 효도는 모든 행실의 근본이니, 문종이 앵두나무를 심고 손수 키워 그 열매를 세종께 드린 것은 진어할 다른 물건이 없어서가 아니라, 효도를 위해서는 하지 않는 일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아뢰었다.(『중종실록』 중종 5년 1510년 3월 17일 기사) 이러한 앵두는 그냥 먹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앵두편, 앵두정과, 앵두화채, 앵두숙 등을 만들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앵두를 주재료로 한 음식 중에 앵두정과는 『산가요록(山家要錄)』, 『산림경제(山林經濟)』, 『박해통고(博海通攷)』, 『해동농서(海東農書)』, 『고사신서(攷事新書)』 등에 만드는 법이 나오는데,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개 앵두를 꿀과 섞은 다음 뭉그러질 때까지 끓여서 엿 같은 상태가 되도록 졸여서 만든다. 또 앵두화채는 잘 익은 좋은 앵두를 골라 씨를 발라내고 꿀에 재운 후 꿀물을 달게 타고 잣을 띄워 만들었다(『시의전서(是議全書)』). 앵두 말고도 조선시대에는 앵두 잎과 앵두나무 가지를 요리에 이용하기도 했다. 이것을 먹었던 것은 아니고, 고기를 삶을 때 넣었다. 조선 전기의 어의(御醫)였던 전순의(全循義, ?-?)의 『산가요록(山家要錄)』에서는 소머리를 삶을 때 앵두 잎을 소의 입안에 채우거나 찧어서 소머리에 바르면 쉽게 익는다고 하였다. 『증보산림경제』에서는 거위를 삶을 때 앵두나무 잎 몇 개를 넣으면 쉽게 무른다고 하였다. 또 홍만선(洪萬選: 1643-1715)의 『산림경제(山林經濟)』에서는 늙은 수탉을 삶을 때 앵두나무 가지를 솥 안에 교차시켜 걸쳐 놓고, 그 위에 닭을 올린 다음 물을 충분히 붓고 삶으면 쉽게 익는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고기를 삶을 때 앵두 잎이나 앵두나무가지를 이용하면, 고기가 더 빨리 흐물흐물해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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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필자
- 김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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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한식[식재료]
- 이미지출처
- 한국민속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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