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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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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수박[無等山西瓜]는 전라남도 광주(光州) 무등산에서 나는 재래종 수박이다. 무등산수박은 대개 처서(處暑)가 지나서 8월 하순에야 수확되기 때문에 다른 수박에 비해 출하 시기는 늦지만, 타원형 모양에 크기가 2, 3배 크고 무게도 10~30킬로그램에 달할 정도로 무거운 수박이며, 씨가 적고 맛도 아주 달다. 이 수박은 흔히 볼 수 있는 수박과 달리 검은 줄무늬 없이 전체적으로 짙은 녹색이어서 ‘푸렁이’라고도 불린다. 특히 껍질이 두꺼워서 오래 보관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인데, 껍질은 두껍지만 칼을 대면 수박이 대나무를 쪼갤 때처럼 짝짝 갈라지는 특성을 갖고 있다.(<동아일보> 1978년 8월 25일, <경향신문> 1982년 9월 29일 기사) 조선 후기에도 이미 이름이 났던 무등산수박은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임하필기(林下筆記)』에도 나오는데, 이에 따르면 조선에서는 경기의 석산(石山)과 호남의 무등산(無等山), 평안도의 능라도(綾羅島)에서 나는 수박이 가장 좋다고 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도 무등산수박의 명성은 이어져서,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은 『조선상식문답(朝鮮常識問答)』에서 허균(許筠: 1569-1618)의 「도문대작(屠門大嚼)」에 “세상에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무등산 수박”이 안 나오는 걸 보면 「도문대작」은 조선 전국의 특산물을 적은 게 아니라 허균 자신이 먹어본 것을 적은 데 불과하다고 평했을 정도이다.(최남선, 2007: 63쪽) 누구나 다 아는 수박이다 보니, 옛날 옛적에 저 전라도 광주의 높고 높은 무등산 산자락에서 엄청나게 커다란 수박이 떼굴떼굴 굴러 내려온다는 식의 내용이 포함된 옛날이야기도 많은 지역에 전해져 왔다. 이렇게 무등산수박이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덕분에 일제강점기에는 광주를 아는 사람이라면 바로 무등산수박을 떠올리고, 수박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먼저 무등산수박을 찾는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여름 동안은 날마다 무등산으로부터 길이 미어지게 수박이 내려오는데, 전라도 일대는 물론이고 조선 전역으로부터 온 장사꾼들이 장날이면 서울, 부산, 대구, 목포 기타 각처로 무등산수박을 사서 기차로 실어갔다.(<동아일보> 1926년 6월 27일 기사) 이후 1960대까지만 해도 재배가 활발하여, 서울에 유학하는 광주 출신 학생들은 여름방학이 끝나 서울에 갈 때면 교수나 하숙집 주인에게 주는 선물로 무등산 수박을 잊지 않고 챙겼다고 한다.(<동아일보> 1976년 9월 9일 기사) 특히 무등산수박은 ‘광주의 명물’로도 유명했지만, 지역민들은 ‘조선시대 진상품’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이 높다. 다만, 진상을 하던 수박은 무등산 전체에서 다 생산되는 것은 아니고 장원봉(壯元峯)에서 나는 것이었다고 한다.(<동아일보> 1930년 11월 20일 기사) 사실 무등산수박이라 해서 무등산 아무 곳에나 심어도 되는 것은 아니었고, 해발 5백 미터 이상 고지대에서 재배해야 제 맛이 난다고 한다. 이런 특성 때문에 무등산수박은 한때 위기를 맞기도 했다. 1973년 무등산 일대가 그린벨트로 지정되면서 무등산수박의 재배 자체가 불가능해진 것이다. 이에 무등산수박의 명맥이 끊길 것을 우려한 광주시에서는 관계당국과 교섭하여 3년 만에 다시 농촌지역 특수작물로 수박 재배를 허가하고 씨앗까지 무상으로 공급해 줌으로써 무등산수박의 생산이 재개되었다.(<동아일보> 1976년 9월 9일 기사) 그런데 무등산수박의 위기를 초래한 것은 재배지역이 그린벨트로 지정된 것만은 아니었다. 무등산수박은 수확시기도 다른 수박에 비해 늦지만, 수확하기까지의 기간도 보통 수박보다 두 달 이상 더 걸렸다. 게다가 비료를 전혀 쓰지 않고 퇴비만으로 키워야하기 때문에 농사를 짓는 데 훨씬 힘이 들고 고되었다. 농사에 들어가는 시간과 수고에 비해 수익성이 떨어지면서, 무등산수박의 재배를 포기하는 농가가 증가하였다. 무등산수박을 키우는 작업이 얼마나 조심스럽고 고된지는 다음을 보면 알 수 있다. 수박을 심기에 앞서 먼저 땅을 1미터 정도로 깊이 파고, 거기에 꼬막껍질에 석회, 깻묵 등이 들어가는 온갖 종류의 거름을 채운다. 그곳에 수박씨를 심은 뒤 넝쿨 중에서도 가장 싹이 좋은 것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다 따버린다. 또한 수박이 익어갈 무렵에는 재배하는 사람이나 그 가족들을 초상집이나 아기 낳은 집에 가서는 안 되고, 초상집 사람이나 아기 밴 사람이 수박밭에 들어가서도 안 된다는 금기도 있어서, 이를 어기면 수박이 익다 말고 썩어버린다고 여겼다. 또 수박밭 근처에 삼[麻]이 자라면 뽑아버렸는데, 상복(喪服)을 만드는 삼베의 원료로 쓰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공을 들이고 조심하며 키우다 보니 수박은 크고 달지만, 한 구덩이에서 한, 두 개밖에 따낼 수밖에 없어서 가격이 아주 높아 아무나 사먹기 어려웠다. 이로 인해 무등산수박은 서울과 부산 등 대도시로 다 나가버리고, 광주 토박이 가운데에도 무등산 수박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가 되었다.(<동아일보> 1978년 8월 25일자; <경향신문> 1979년 3월 12일, 1996년 10월 3일자; <한겨레> 1998년 9월 9일자)

제작자
(사)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집필자
김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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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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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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