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문화사전

설렁탕(별건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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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12월 1일자 잡지 『별건곤』에 ‘우이생(牛耳生)’이란 필명을 가진 사람이 ‘괄세 못할 경성 설넝탕, 진품 명품 천하명식 팔도명식물례찬’이란 제목의 글을 게재했다. 이 글을 통해 이미 근대 도시의 면모를 갖춘 1920년대 서울에서 설렁탕이 상당한 인기를 누렸음을 알 수 있다. 그 원문은 다음과 같다. “말만 들어도 위선 구수-한 냄새가 코로 물신물신 들어오고 터분한 속이 확 풀니는 것 갓다. 멋을 몰으는 사람들은 설넝탕을 누린 냄새가 나느니 쇠똥냄새가 나느니 집이 더러우니 그릇이 불쾌하니 하지만 그것은 정말로 설넝탕에 맛을 드리지 못한 가련한 친구다. 만일 설넝탕에서 소위 누린 냄새라는 것을 빼이고 툭백이〔뚝배기〕 대신으로 유기나 사기에 담어서 파․양념 대신 달은 양념을 넛코 소곰과 거쳥〔거친〕 고추가루 대신 가는 고추가루와 진간장을 쳐서 시험 삼어 한번 먹어보아라. 우리가 보통 맛보는 설넝탕의 맛은 파리 죡통만큼도 못 어더볼 것이다. 그져 덥혀노코〔덮어놓고〕 설넝탕의 맛은 그 누린 냄새 ― 실상 구수-한 냄새와 툭벡이와 소곰을 갖추어야만 제 맛이 난다. 설넝탕을 일반 하층계급에서 만히 먹는 것은 사실이나 제아모리 졈잔을 뻬는 친고〔친구〕라도 죠선 사람으로서는 서울에 사는 이상 설넝탕의 설녕설녕한 맛을 괄세하지 못한다. 갑시〔값이〕 헐코 배가 불으고 보가 되고 술 속이 풀니고 사먹기가 간편하고 귀천(貴賤) 누구 할 것 업시 두로 입에 맛고……. 이외에 더 업허 먹을 것이 또 어데 잇으랴. 설넝탕은 물론 사시(四時)에 다 먹지만 겨울에 겨울에도 밤 ― 자졍이 지난 뒤에 부르르 덜니는 억개〔어깨〕를 웅숭커리고 설넝탕ㅅ집을 차져가면 위선 짐〔김〕이 물신물신 나오는 드수한 기운과 구수한 냄새가 먼져 회를 동하게 한다. 그것이 달은 음식집이라면 제 소위 졈잔하다는 사람은 압뒤를 좀 살펴보느라고 머뭇거리기도 하겟지만 설넝탕집에 들어가는 사람은 절대로 해방적(解放的)이다. 그대로 척 들어서서 ‘밥 한 그릇 쥬’ 하고는 목노 걸상에 걸어안즈면 일 분이 다 못 되여 기름ㅅ기가 둥둥 뜬 툭벡이 하나와 깍둑이 졉시가 압해 노여진다. 파․양념과 고추가루를 듭신 만히 쳐서 소곰으로 간을 맛츄어가지고 훌훌 국물을 마셔가며 먹는 맛이란 도모지 무엇이라고 형언할 수가 업스며 무엇에다 비할 수가 업다. 그야말로 고량진미를 가득히 늘어노코도 입맛이 업서 졋갈로 끼지럭 끼지럭 하는 친고도 설넝탕만은 그러케 괄세하지 못한다. 이만하면 서울의 명물이 될 수가 잇스며 따러서 조선의 명물이 될 수가 잇다.” 이 글의 저자 우이생은 필명이다. 우이생의 ‘우(牛)’는 설렁탕의 주재료인 소를 가리키며, ‘이(耳)’는 소의 입장이라는 뜻이고, ‘생(生)’은 저자가 남성임을 알려준다. 1900년 이전부터 서울 종로의 뒷골목에는 설렁탕집이 여럿 있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그래서 설렁탕은 다른 말로 ‘서울설렁탕’인 셈이다. 그 이유는 조선시대 내내 시행되었던 소도살 금지령인 우금(牛禁)과 관련이 있다. 성균관은 다른 이름으로 반궁(泮宮)이라고 불렸다. 여기에서 반(泮)은 학교라는 뜻이다. 왕이 직접 관할하기도 했기 때문에 반궁이라고 불렀다. 성균관에서 온갖 잡일을 하는 사람들을 반인(泮人)이라고 불렸다. 이들 성균관의 노비들이 사는 동네는 성균관 근처에 있었다. 반인들이 모여 산다고 하여 이곳을 사람들은 반촌(泮村)이라 불렀다. 성균관으로 들어가는 데 있었던 다리인 향석교(香石橋)를 중심으로 동반촌과 서반촌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반인은 본래 고려 말 안향(安珦: 1243-1306)이 당시의 고려 개경에 있던 성균관에 기증한 노비들의 후손들이었다. 한양에서 성균관이 개교할 때 개경에서 이곳으로 이사를 와서 살았다. 그러니 그들이 쓰는 말은 한양 말씨가 아니라 개경 말씨였다. 그런데 반인들에게는 어느 누구도 누리지 못했던 특권이 있었다. 바로 성균관의 학생인 유생(儒生)들에게 반찬으로 제공하는 소고기를 장만하기 위해 소를 도살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 받았던 것이다. 원래 조선시대 가축을 잡는 도살은 백정(白丁)이 하는 일이었다. 백정은 매우 낮은 신분의 사람들로 무시되었다. 이에 비해 반궁이라 불렸던 반촌에서 소 도살을 할 수 있었던 반인은 비록 백정과 다름이 없었지만, 그래도 한양에서 소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어 소고기를 구하고자 했던 관리들로부터 청탁을 많이 받았다. 더욱이 성균관에서는 공자에게 지내는 제사를 계절마다 모셨다. 이 때 중요한 제물 중의 하나가 바로 소고기였다. 그래서 반인 중에서 일부는 푸줏간인 현방(懸房)에서 소고기 판매하는 일을 했다. 이 푸줏간은 한양에서 소 도살과 함께 소고기를 독점하여 판매하는 일도 맡았다. 그래서 이들을 ‘다림방’ 혹은 ‘도사(屠肆)’라고 불렀다. 이 일을 맡았던 반인들은 제사에 쓰고 남은 소고기를 판매하여 먹고 살았다. 조선시대 왕실과 한양의 지리와 제도 따위를 적은 책으로 대체로 19세기 때 쓰인 책인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의 권2 한성부(漢城府) 포사(舖肆)에는 18세기에 한양에 23개의 푸줏간이 설치되어 소고기 판매를 했다고 적혀 있다. 반인 중 일부는 재인(宰人)이라고도 불렸다. 이들은 소를 도살하고 푸줏간을 운영하면서 왕실에서 열린 여러 가지 행사에서 놀이꾼이 되기도 했다. 김두한(金斗漢: 1918-1972)의 육성고백에 의하면, 1930년대 서울 종로 3가 단성사 옆에는 형평사 부회장을 하던 원씨 성을 가진 노인이 설렁탕집을 했다고 한다. 형평사(衡平社)는 1923년 5월 진주에서 백정을 주축으로 한 천민계급이 조직한 단체를 가리킨다. 진주에 사는 백정 이학찬(李學贊)의 아들이 학부형과 학교 측의 반대로 보통학교 입학이 좌절되자, 이에 격분하여 각 지방의 대표 100여 명과 회원 500여 명이 진주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형평, 즉 평등을 내세우면서 형평사를 조직했다. 즉 푸줏간의 백정들이 연합회를 만든 것이다. 1894년 조선의 고종은 개화파의 입장을 수용하여 사민평등(四民平等)을 법으로 정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소를 잡고 소고기를 다루는 백정은 사람들로부터 계속해서 회피의 대상이었다. 실제 속내는 소고기를 좋아해서 어쩔 줄을 몰랐지만, 그것을 다루는 사람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인식이 조선 사람들 사이에서 팽배했다. 결국 근대도시로 진출한 백정들은 정육점을 직접 운영하면서 그 부산물로 만드는 설렁탕집을 함께 운영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천민으로 취급되던 옹기 장인들이 만든 뚝배기에 설렁탕을 담아냈고, 그 값도 싸서 서민들이 애용하는 음식이 되었다. 점잔을 빼던 서울 양반들도 이미 설렁탕 맛에 반해 있었다. 하지만 백정이 운영하는 설렁탕집에 직접 가서 먹으려니 천민과 어울리는 꼴이 되어 여간 곤란하지 않았다. 양반뿐만이 아니라 최신의 유행을 쫓았던 1920년대 모던보이와 모던걸 역시 설렁탕집 출입을 그다지 유쾌하게 여기지 않았다. 중국인들이 식당에 직접 가지 않고 음식을 배달시켜 먹는 모습을 본 그들은 설렁탕도 똑같은 방식으로 집에 앉아서 먹었다. 이러한 사정은 앞에서 소개한 『별건곤』 1929년 12월 1일자에 실린 「무지(無知)의 고통(苦痛)과 설넝탕(湯) 신세, 신구가정생활(新舊家庭生活)의 장점과 단점」이란 글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좀 심한 말이라고 할는지 모르겠으나 신가정을 일구는 사람은 하루에 설넝탕 두 그릇을 먹는다고 합니다. 왜 그러냐하면 청춘부부가 새로 만나서 달콤한 꿈을 꾸고 돈푼이나 넉넉할 적에는 양식집이나 폴락거리고 드나들지만 어찌 돈이 무제한하고 그 두 사람의 행복을 위하여만 제공될 리가 있겠습니까. 돈은 넉넉지 못한데다가 아침에 늦잠을 자고 나니 속은 쓰리지만 찬물에 손 넣기가 싫으니까 손쉽게 설넝탕을 주문한답니다. 먹고 나서 얼굴에 분 쪽이나 부치고 나면 자연이 새로 3시가 되니까 그적에는 손을 마주 잡고 구경터나 공원 같은 데로 산보를 다니다가 저녁 늦게 집에를 들어가게 되니까 어느 틈에 밥을 지어먹을 수 없고 또 손쉽게 설넝탕을 사다 먹는 답니다. 그래서 하루에 설넝탕 두 그릇이라는 것인데 이것도 물론 신가정의 부류에 속하는 자라고 합니다.” 실제로 1920년대 중반 설렁탕 한 그릇의 값은 10전에서 15전 사이였다. 담배 한 갑이 10전을 할 때이니, 설렁탕 한 그릇 값이 담배 한 갑과 거의 맞먹었다. 지금이야 수육이 설렁탕보다 몇 배가 비싸지만, 당시에는 고기를 5전어치 더 달라고 하면 되었다. 이렇게 따져보면 그야말로 설렁탕은 무척 싼 음식이었다. 막노동을 하던 가난한 사람들도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손쉽게 사 먹을 수 있었던 음식이 바로 설렁탕이었다.

제작자
(사)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집필자
주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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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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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원연합회
분야
한식[문학]
이미지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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