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화

설렁탕은 소고기의 머리, 잡육, 쇠뼈, 내장 등을 넣고 오랜 시간동안 푹 끓이는 음식으로 서울의 명물이다. 이 음식의 기원이나 이름의 유래에 관해서는 현재까지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으나, 몇 가지 주장이 존재한다. 우선, 고려가 몽고의 지배하에 있을 때 들어온 음식물이라는 것이다. 몽고어로 고기를 삶은 물인 공탕(空湯)이라는 뜻의 ‘슐루’가 한반도에 전해지면서 발음이 변하여 설렁탕이 되었다는 의견이 있다. 고기를 맹물에 삶아 소금 등으로 간을 하는 조리법도 이 때 도입된 것으로 추측되는데, 설렁탕의 도입은 불교의 영향으로 채식 위주의 식생활을 했던 당시의 고려 사람들 사이에 점차 육식이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강인희 2000) 또 다른 설은 조선시대의 일화이다. 임금이 오늘날의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부근에 위치한 선농단(先農壇)이라는 제단에서 친히 농사 시범을 보여 농사의 소중함을 백성에게 알렸다고 한다. 그 후 음식을 만들어서 사람들과 나누어 먹었다고 하는데 이 ‘선농단’이 기원이 되어 설렁탕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는 주장이 있다. 이 음식이 언제부터 식당에서 판매되었는지에 관해서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20세기 초반, 신문지상에는 설렁탕과 관련된 기사가 종종 등장하였는데 이를 통해 설렁탕이 당시 조선인들의 외식 메뉴로 상당히 인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15년 9월 27일자 <매일신보> 의 ‘독자기별’이라는 독자투고란에서는 상한 고기를 파는 설렁탕집에 대한 경찰 단속을 강화해 줄 것을 요청하는 독자의 목소리가 게재되어 있다. 또, 자칭 ‘일빈민(一貧民)’이라는 필명을 쓰는 독자는 ‘불결한 설렁탕, 좀 정하게 합시다.’ 라는 제목으로 1924년 12월 2일 <매일신보>에 기고를 하였다. 이 글 역시 설렁탕집의 위생문제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글의 서두에 ‘조선에서 가장 값싸게 가장 맛있게 가장 보편적으로 각 방면에 요구에 의하는 음식은 설렁탕이 아마 제일 위에 있을 것이올시다. 그같이 민중의 수요가 높고 조선 사람의 식성에 적합한 설렁탕은 실로 조선음식계의 패왕이라고 하여도 좋을 것이올시다.’ 라고 말하고 있다. 1939년 2월 25일 <동아일보> 지면에서는 당시 식당에서 파는 조선 음식 중에 가장 대중적인 것은 장국밥, 대구탕, 냉면을 비롯하여 서울의 명물인 설렁탕이며, 종로통을 가운데에 두고 좌우, 골목 안쪽까지 이들 음식을 파는 가게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고 하였다. 이 기사에서는 식당에 들어갈 때, ‘체면 잇는(체면을 차리는)’ 사람들은 ‘얼굴이 뜨끈거리’는 것이 사실이지만, 맛있는 것을 먹겠다는 일념으로 이러한 음식들을 사 먹는다고 하였다. 설렁탕의 재료가 되는 소고기의 부산물은 다름 아닌 백정이 취급하는 것이었다. 즉, 당시 설렁탕집은 백정이나 그와 관계되는 사람들이 운영하는 곳으로, 품위 있는 사람들이 드나들 만 한 식당이 아닌 곳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설렁탕의 맛은 당시 조선 사람들의 인기를 끌기에 충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신문기사를 바탕으로, 20세기 초반, 조선에는 설렁탕을 파는 식당이 상당히 많이 있었고, 조선민중, 특히 서민들이 외식을 할 때 즐겨 찾는 격식 없는 음식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설렁탕의 인기는 조선인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일제시대 조선에 거주했던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꽤 인기가 있었다. 1909년에 출간된 『조선만화(朝鮮漫畵)』는 조선통감부의 기관지 <경성일보>의 기자로 조선에 거주했던 우스다 잔운(薄田斬雲: 1877-1956)과 토리고에 세이시(鳥越靜岐: ?-?)가 각각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책이다. 내용 중에 '쇠머리 스프' 라는 이름으로 설렁탕에 관한 글이 있는데 아래와 같이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의사들의 감정에 따르면, 이 쇠머리 스프는 정말로 좋은 것으로, 닭고기 스프나 우유가 그에 미칠 바가 아니라고 한다. 큰 솥은 일 년 내내 걸어놓으며, 바닥까지 아주 깨끗이 씻는 일도 없다. 매일매일 뼈를 교체하고 물을 더 부어서 끓여낸다. 이 국물, 즉 스프는 아주 잘 끓여낸 것으로, 매일 연속해서 끓이기 때문에 여름에도 상하는 일이 없으며, 이것을 정제하면 분명 세계 어느 것과도 비견할 수 없는 자양품(慈養品)이 된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 지금 쇠머리 스프를 병에 담아 한국 특유의 수출품으로 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주영하 2013) 설렁탕이 서울 지역의 명물이 된 배경에는 소의 부산물이 서울을 중심으로 공급되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박제가(朴齊家, 1750~1805)의 『북학의(北學議)』의 내편(內篇)‧우(牛)에서는 ‘우리나라에서는 날마다 소 500마리를 나라의 제사나 호궤(犒饋, 군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제공하는 특별식)에 쓰기 위해 잡는다. 더불어 반촌(泮村)과 한양 5부(部)의 24개 가게(포, 舖)를 비롯해 300여 고을(주관, 州官)에도 반드시 가게를 연다.’ 라고 하였다. 즉, 소고기를 각종 제사 등에 사용하고 그로 인해 생겨난 부산물을 활용한 것이었다. 이것이 19세기 말 서울에서 끼니음식으로 판매된 것이 설렁탕이다. (주영하 2013)
- 제작자
- (사)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 집필자
- 박경희
- 발행기관
-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원연합회
- 저작권자
- 한국문화원연합회
- 분야
- 한식[음식]
- 이미지출처
- 한국민속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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