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문화사전

녹해
녹해 이미지

녹해는 사슴고기를 소금에 절여서 만든 일종의 젓갈이다.
녹해는 일상음식은 아니었고, 조선 왕실의 각종 제의에 제물(祭物)로 쓰였다.
사슴으로 만들어 제상에 차리는 음식으로는 두 가지가 있었는데, 두(豆)에는 녹해(鹿醢), 변(籩)에는 녹포(鹿脯)를 담아 올렸다.
그런데 녹해는 일반적인 반찬이 아니다보니, 조선시대 문헌에 녹해의 조리법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다만, 이규경(李圭景: 1788∼1863)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중국 원대(元代)의 백과전서인 『거가필용사류전집(居家必用事類全集)』의 「기집(己集)」 제장류(諸醬類)의 ‘조녹해법(造鹿醢法)’을 인용한 방법이 보인다. 이에 따르면, 힘줄과 막을 제거하고, 진흙처럼 잘게 다진 사슴고기에 술누룩, 소두국(小豆麴), 홍두(紅豆), 천초(川椒), 필발(蓽撥), 좋은 생강, 회향(茴香), 감초, 계심(桂心), 무이(蕪荑) 가루, 육두구(肉荳蔲), 파의 흰 뿌리를 곱게 다진 것을 잘 섞는다. 그런 다음 찹쌀술을 넣어 골고루 섞어, 농도를 적당히 한 후 입구가 작은 항아리에 담아 밀봉하고, 보름에 한 번 고루 휘저어 둔다. 항아리는 낮에는 뜰에서 햇볕을 쬐이고, 밤에는 따뜻한 곳에 옮겨 두고 백일이 지나면 먹으라고 했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세종실록(世宗實錄)』 128권 「오례 길례 서례 찬실도설」에 『의례통해(儀禮通解)』의 속주(續注)를 인용한 녹해의 조리법이 보인다.
이에 따르면, 사슴고기를 포로 떠서 말린 후에 잘게 썬 것에 수수누룩, 소금, 좋은 술을 섞어 항아리에 백일 동안 두라고 하였다. 조선 왕실에서 녹해를 어떤 방식으로 만들었을지는 정확치 않으나, 의례의 전거를 중요시했음을 고려하면 『오주연문장전산고』의 방법보다는 『세종실록』 오례의 방법을 따랐을 것으로 여겨진다. 문제는 녹해를 1년에 한 번 만들어 두었다가, 제사 때에 맞춰 쓰기 때문에 맛이 변한 것을 제상에 올리는 일이 자주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세종(世宗: 재위 1418-1450)은 녹해는 모두 가을에 만들어 쓰는데, 봄에 만들어 여름과 가을에 제수로 쓰고, 가을에 만들어 겨울과 봄에 쓰면 어떠한지 상고하라고 명하였다.(『세종실록』 세종 4년 1422년 2월 30일 기사) 하지만 녹해의 맛과 냄새가 쉽게 변하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영조(英祖: 재위 1724-1776) 때에도 여전히 1년에 한번 녹해를 담그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일 년 동안 쓸 녹해를 한꺼번에 만들었던 것은 종묘대제의 제수(祭需) 규정을 따른 것이라 후대에 함부로 바꾸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바꿔야 한다며, 1726년(영조 2년) 신무일(愼無逸)은 영조에게 건의하였다. 겨울과 봄 사이 눈이 가득 내린 뒤에 구한 사슴으로 1년의 제향에 소용되는 녹해를 어림잡아 한 번에 만들어 대비하다보니, 여름이 되면 악취가 나서 가까이 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어 제사상에 올릴 때 불경스러운 마음이 든다며, 앞으로는 사시제(四時祭)를 앞두고 1년에 4번 그때그때 만들면 좋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신무일의 건의를 들은 영조는 1년에 한 번 녹해를 담갔던 이유를 물었다. 이에 사슴은 제철이 아니면 잡기 어려워서 그때 한 번에 담근 것이고, 사슴을 구하기 어려우면 간혹 소고기로 대용해왔다고 아뢰었다. 그러자 영조는 녹해를 소고기로 바꿔 써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궁의 제향은 형식이 중요하니 대용해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였다. 다만, 이전부터 사슴고기로 만든 녹해를 마련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소고기만이 아니라 노루고기를 써왔으니 소고기는 쓰지 말고 노루고기로 만든 장해(獐醢)로 대체하는 일은 허용한다고 명하였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영조 2년 1726년 10월 18일, 10월 23일 기사)

그리하여 영조는 녹해를 장해로 대신해도 된다고 『태상지(太常志)』에 기재하도록 명하였으나, 함경도에서 녹용(鹿茸)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나서 사슴을 구할 수 없는데 어찌 사슴뿔이 이렇게나 올라올 수 있냐며 녹해를 장해로 대신할 수 있다고 한 규정은 명분이 없으니 삭제하라고 해야겠다고 했다. 그러자 영의정 홍봉한(洪鳳漢: 1713-1778)이 사슴은 노루와 달리 많이 잡을 수 없으니 황단(皇壇), 종사(宗社), 문묘(文廟) 이외에는 이전처럼 대신 쓸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하였고, 영조가 그렇게 하라고 허락하였다고 한다.(『영조실록(英祖實錄)』 영조 39년 1763년 9월 16일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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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집필자
김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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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한식[음식]
이미지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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