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문화사전

비빔밥
비빔밥 이미지

비빔밥은 밥과 반찬을 한 그릇에 담고, 간장이나 고추장 양념을 얹어 비벼먹는 음식을 말한다. 비빔밥 안에 밥과 반찬이 모두 담겨 있어서 상차림이 간편한 것이 특징이며, 간단한 한 끼 식사만으로도 영양분을 고루 섭취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 때문에 비빔밥은 평양 해주 서울 전주 진주 통영 등의 지역은 물론 전국 어디서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음식이지만, 동시에 지역 고유의 생태적 문화적 특징을 반영한 음식이기도 하다. 이처럼, 한국인에게 비빔밥은 너무나 일상적인 음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한국인이 언제, 어떤 연유로 비빔밥을 만들어 먹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비빔밥의 유래를 설명하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학설이 존재한다. 첫째, 제사음식을 여러 사람이 나눠먹는 데서 시작되었다는 ‘제사음식설’, 둘째, 농번기에 여러 일꾼을 먹이기 위해 음식을 한꺼번에 비벼서 내줬다고 하는 ‘농번기음식설’, 셋째, 동학농민항쟁(전주성전투) 시 여러 음식을 한 데 비벼먹은 데서 유래되었다고 하는 ‘동학농민설(진주성전투설)’, 넷째,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으로 임금이 몽진했을 때 수라상에 올릴 만한 음식이 없어서 하는 수 없이 밥에 몇 가지 나물을 비벼 올렸다는 ‘임금몽진설’, 다섯째, 묵은 음식을 음력 정월 보름에 먹었다는 ‘묵은 음식설’ 등이 회자되고 있다. 비빔밥의 기원과 유래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몇몇 문헌기록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비빔밥은 한자로 골동반(骨董飯, 또는 汨董飯), 혹은 혼돈반(混沌飯)으로 불렸다(『정조실록(正祖實錄)』 정조 7년 7월 4일 기사; 『기재잡기(寄齋雜記)』; 『시의전서(是議全書)』; 『하재일기(荷齋日記)』 등). 그리고 19세기 조리서로 알려진 『시의전서』에서는 비빔밥을 ‘부븸밥’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과거 비빔밥의 한자명칭과 한글명칭을 확인할 수 있다. 둘째, 비빔밥에 들어가는 재료가 상상을 초월할 만큼 아주 다채로웠다는 사실이다. 조선후기의 지식인 이규경(李圭景: 1788-1863)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인사편(人事篇)」에 실린 ‘산주자미변증설(山廚滋味辨證說: 산골부엌의 맛있는 음식에 대한 변증설)’에는 각종 생선회에 겨자와 간장을 곁들인 비빔밥, 전어구이를 넣은 비빔밥, 게장, 혹은 젓갈을 넣은 비빔밥, 김 가루나 콩가루를 넣은 비빔밥 등이 실려 있다. 이는 그 당시에도 매우 다양한 비빔밥이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셋째, 비빔밥의 조리법이 끊임없이 진화하고, 변주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16세기 말에 쓰여진 것으로 알려진 박동량(朴東亮: 1569-1635)의 『기재잡기』에는 “遂以飯一盆。襍以魚菜。如俗所謂混沌飯。(곧 밥 한 대접에다가 어육과 채소를 섞어서 세상에서 말하는 소위 비빔밥과 같이 만들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또한 『시의전서』나 방신영의 『조선요리제법(朝鮮料理製法)』에서도 비빔밥 재료로 간납, 누르미, 산적, 전유어 등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인이 즐기는 비빔밥은 누르미나 전유어 대신, 소고기육회, 조갯살, 멍게 등을 사용하고 있다. 넷째, 비빔밥에 쓰이는 양념이 간장에서 고춧가루, 그리고 고추장으로 변화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대에 따라 비빔밥으로 유명한 지역이 달라져왔다는 사실이다. 19세기의 실학자 이규경이 살았던 시대에는 평양의 채소비빔밥이 유명했었다(이규경, 『오주연문장전산고』). 그러나 일제강점기로 접어들면서 진주비빔밥과 전주비빔밥이 유명세를 떨치게 되었고, 1970년대 이후 현재까지는 전주비빔밥이 비빔밥의 대명사가 되고 있다.

제작자
(사)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집필자
양미경
발행기관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원연합회
저작권자
한국문화원연합회
분야
한식[음식]
이미지출처
한국민속대백과사전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 이용금지+변경금지 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빠른 이동 메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