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화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소반(小盤)’을 식탁으로 사용했다. 소반은 그 이름처럼 크기가 작아서 들고 나르기 좋은 식탁이다. 다른 말로는 ‘식안(食案)’이라고 불렀다. 생김새에 따라 둥근 소반, 사각 소반, 팔각 소반 등이 있다. 나주반(羅州盤)․통영반(統營盤)․해주반(海州盤) 같은 이름은 생산지를 기준으로 분류한 것이다. 둥근 소반의 다리 모양을 두고 호족반(虎足盤)이니 구족반(狗足盤)이니 부르기도 한다. 호족반은 소반의 다리 모양이 호랑이의 다리를 닮아서, 구족반은 개의 다리를 닮아서 부르는 명칭이다. 소반의 유래와 관련된 기록은 북송 서긍(徐兢)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는 “요사이 고려인은 탑 위에 다시 소조(小俎)를 놓는다.”고 했다. 즉, 평상 위에 ‘소조’라는 식탁을 놓았던 것이다. ‘조(俎)’는 고대 중국에서 고기나 채소를 자르는 데 사용했던 다리가 없는 도마이다. 다른 말로 ‘조궤(俎几)’라고도 불렀다. 큰 도마인 ‘대조(大俎)’는 많은 제물을 쌓는 데 사용한 제기였다. 서긍이 ‘소조’라고 한 것으로 보아 다리가 없는 작은 도마로 보인다. 이것이 바로 고려 왕실에서 공식적인 연회가 있을 때 낮은 급수의 관리에게 제공했던 식탁이다. ‘소조’와 비슷한 식탁은 한나라 때의 화상석(畫像石) 중에 귀족들이 모여서 식사하는 장면의 그림이 그려진 것이 있다. 비록 한 사람당 하나의 ‘소조’는 아니지만 사각반에 매우 짧은 다리가 달려 있다. 이것이 바로 한나라 때 지배층이 사용했던 ‘소조’였다. 식민지시기에 조선의 소반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 1891-1931)는 소조에서 소반이 나왔지만, 조선의 소반은 중국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가 살았던 시기에 직접 본 중국 한족들의 식탁은 입식이었기 때문에 그런 주장을 펼쳤을 가능성이 많다. 그는 당나라 이전의 고대 중국인들이 소조나 소반을 식탁으로 사용한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조선 초에 사용되었던 식탁의 실물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세종실록』의 「오례(五禮)」 중 흉례(凶禮)의 명기(明器)를 그림으로 그린 자료에 나온다. ‘식안’이란 이름이 붙여진 이 식탁은 사각의 상판에 네 개의 다리를 붙인 식탁이다. 흉례 때 제물을 차리는 식탁이라서 검은색의 옻칠을 했다. 이로 미루어 소반의 역사는 이미 세종 때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1585년에 개최된 연회를 그린 「선조조기영회도(宣祖朝耆英會圖)」에도 소조형 식탁이 나온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이 그림이 그려진 때보다 딱 20년 후인 1605년(선조 38)의 잔치를 그린 「선묘조제재경수연도(宣廟朝諸宰慶壽宴圖)」에는 다리가 있는 식탁이 그려져 있다. 그것도 다리가 마치 통처럼 되어 있다고 해서 조선후기에 ‘통각반(筒脚盤)’이라고 불렸던 식탁이다. 1584년 이전에 그려졌을 것으로 여겨지는 「기영회도(耆英會圖)」에도 다리가 세 개 달린 소반이 나온다. 이를 통해서 조선 초기의 양반들은 다리가 없는 ‘소조’와 다리가 있는 ‘소반’을 동시에 사용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에 그려진 그림에서는 소조형 식탁이 나오지 않는다. 소조에 다리가 붙게 된 배경에는 민간의 살림집에 온돌이 확산되었기 때문일 수 있다. 겨울에 온돌의 열기가 올라오자 다리가 없는 소조형 식탁도 같이 뜨거워졌고, 이 때문에 다리가 있는 소반을 사용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특히 18세기가 되면 부유층은 물론이고 일반 백성의 살림집에도 방에 온돌이 깔렸기 때문에 이 시기가 되면 다리가 있는 소반이 널리 사용되었을 것이다. 조선 후기 개다리소반은 충주에서, 호족반은 나주에서 잘 만들었다. 특이한 모양의 소반도 있었다. 한 개의 기둥이 위판인 판의 중심을 받치고 있는 단각반, 통 모양의 다리에 만(卍)자 무늬나 장방형의 창(窓)을 투각한 풍혈반(風穴盤), 다리가 기둥 하나로 된 일주반(一柱盤) 등이다. 쓰임새를 염두에 두고 이름을 붙인 소반도 있었다. 공고상(公故床)이 대표적인 소반이다. 관리의 식사 때 사용한다고 하여 이름이 붙여진 공고상은 8각 또는 12각의 상판에 8각, 12각의 다리가 바로 붙은 구조의 식탁이다. 이 공고상은 관리의 식사를 노비들이 옮길 때 다리 속에 머리를 넣고 이고 다니는 데 알맞은 식탁이었다. 또 당번인 관리가 스스로 먹을 음식을 자기 집에서 차려올 때 사용하는 상이라고 하여 번상(番床)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상의 다리 사이에 머리를 쏙 넣어도 판각에 눈 코 입이 노출되도록 구멍이 뚫려 있기 때문에 앞을 볼 수도 있고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할 수도 있었다. 소반이 아무리 널리 사용된 식탁이라고 해도 높은 신분과 경제력을 갖추지 않으면 사용하기 어려웠다. 왕실이나 관청, 그리고 부유한 양반의 집에서나 사용할 수 있는 고급 식탁이었다. 제대로 격식을 갖춘 소반은 반드시 좋은 기술을 지닌 장인만이 만들 수 있었다. 좋은 나무로 만들어야 격식도 높아졌다. 그래서 왕실에서조차 진연이나 진찬과 같은 수백 명이 참여하는 잔치를 개최할 때 미리 소반을 확보하는 일이 매우 중요했다. 잔치 날짜가 정해지면 이 행사를 주도하는 관청에서는 목수 수십 명을 뽑아서 소반을 만들도록 지시를 내렸다. 이런 사정이니 아주 부자가 아닌 이상 일반 양반의 집에서 수십 개의 소반을 갖추고 있기는 어려웠다. 서유구(徐有榘: 1764-1845)는 “중국인은 모두 의자에 앉기 때문에 매번 두서너 명이 하나의 탁자에 함께 앉아 식사한다. 우리나라 사람은 땅에 앉기 때문에 한 사람에게 오로지 한 개의 소반을 준다.”고 했다. 조선 인종 때의 향촌선비 조극선(趙克善: 1595-1658)은 현재의 충청남도 예산군 봉산면 대지리(大支里)에 살면서 그의 스승과 식사를 할 때는 각자 하나씩의 소반을 사용했다. 심지어 길거리 주막에서도 양반 남성은 혼자서 이런 직사각형 소반 받았다. 18세기 후반이 되면 중인이나 농민들의 가정에까지 소반이 확산되었다. 김홍도(金弘道: 1745-?)가 그린 것으로 알려진 『단원풍속화첩』 중에 나오는 ‘주막’ 그림에서 부상(負商)으로 보이는 남성 한 사람은 조잡하게 만든 사각반을 맨 바닥에 놓고 돌을 깔고 앉은 채 식사를 하고 있다. 가정은 물론이고 주막에서도 양반은 물론이고 천민인 장돌뱅이 남성에게까지 일인용의 소반을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이들은 땅바닥에 돌을 깔고 앉아서 식사를 하였다. 조선후기 이후 소반은 계층을 가리지 않고 가부장(家父長)과 남성의 상징이 되었던 것이다. 동한 때의 맹광(孟光)이란 부인이 소반을 눈썹 높이까지 들고서 남편에게 ‘올린’ 데서 유래한 ‘거안제미((擧案齊眉)’ 이야기 역시 조선시대 남성들이 가장 바랐던 식탁 들기의 규칙이었다. 주자의 해석에서 벗어난 독자적인 글도 곧잘 썼던 박세당(朴世堂, 1629~1703)마저도 부부의 사랑을 읊조리는 시에서 ‘거안제미’하는 부인이 사랑스러워 조강지처(糟糠之妻)를 버릴 수 없다고 했다. 그러니 ‘거안제미’의 소반 옮기기는 조선후기 양반들 사이에서 양처의 상징으로 이해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다음해인 1949년 8월 문교부에서는 ‘국민 의식생활 개선(國民衣食生活改善)’을 위한 실천 요강 몇 가지를 내놓았는데, 그 중에 “가족이 각상(各床)에서 식사하는 폐를 없애서 공동식탁을 쓸 것”이라는 내용도 들어 있다. 여기에서의 ‘각상’은 개다리소반과 같은 소반이며, 공동식탁은 교자상이다. 당시에 얼마나 많은 가정에서 여전히 개다리소반과 같은 1인용 식탁을 사용하고 있었으면 이런 실천 요강이 정부에 의해서 제시되었을까? 심지어 1960년대까지도 일부 가장들은 여전히 소반에서 혼자 식사하는 것을 가장 큰 미덕으로 여기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교자상이 대세가 되어갔다. 사실 다리를 접을 수 있는 교자상은 1891년 일본의 한 발명가가 특허를 낸 다리를 접는 ‘차부다이(チャブ台)’라는 식탁에서 유래한 것이다. ‘차부’는 중국 식탁인 ‘탁복(卓袱)’의 일본식 발음 발음이다. ‘차부다이’의 형태는 사각형과 원형이 있다. 다리를 접는 차부다이는 상다리를 접었다 폈다 할 수 있어 이쪽저쪽으로 옮겨서 사용하기에 편리한 식탁이다. 이것이 1970년대 도시의 인구가 증가하면서 한국에 도입되었다. 좁은 도시의 주택에서 공간 활용에 좋은 다리 접는 교자상이 일대 유행을 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입식 식탁에 갖추어진 아파트가 한국인의 주택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손님맞이와 조상제사를 위해서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교자상을 갖추고 있다.
- 제작자
- (사)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 집필자
- 주영하
- 발행기관
-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원연합회
- 저작권자
- 한국문화원연합회
- 분야
- 한식[미술]
- 이미지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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