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문화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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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배밀의 가장 오래된 유적지는 요르단에 있는 와디 엘 지랏(Wadi el Jilat)으로 알려진다. 중앙아시아의 코카사스 지역으로부터 서아시아의 이란에 주변에서 재배되기 시작한 밀은 동쪽으로는 중국대륙으로 서쪽으로는 아프리카 북부와 지중해연안을 전파되었다. 동아시아 지역에서 밀을 재배하기 적합한 곳은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유럽대륙에 비해서 적다. 다만 여름에 비가 적게 오는 툰드라 지역이 밀농사의 적격지로 알려진다. 따라서 중앙아시아나 몽골의 고비사막 남쪽인 중국의 북부 지역이 밀농사가 가장 잘 되는 곳이다. 중국대륙의 북서부 지역으로 밀농사가 전해진 때는 대체로 서기전 1세기 전후로 추정된다. 한나라의 무제 유철(劉徹: 기원전 156-기원전87년)은 서쪽으로 이동한 대월씨(大月氏)와 결탁하여 흉노(匈奴)를 견제하기 위해서 서역으로 원정을 떠날 사람을 찾았다. 이때 찾은 사람이 바로 탐험가 장건(張騫: ?-기원전114년)이었다. 장건의 서역 탐험 이후 수박 파 마늘 등과 함께 밀이 한나라로 유입되었다. 특히 아랍계의 위구르인과 회인(回人)들이 대거 이주한 당나라 때 밀농사는 중국대륙 서북부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왕에 있던 보리를 대맥(大麥)이라 부르고, 새로 들어온 밀을 소맥(小麥)이라고 불렀다. 중국대륙에서 이렇게 밀가루 음식이 인기를 누리자 그 문명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던 한반도의 지배층 사이에서도 밀가루 음식은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이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는 밀을 구하기 쉽지 않았다. 그 이유는 한반도의 기후환경이 밀 재배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송나라 사람 서긍(徐兢: 1091-1153)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서 당시 고려에서 밀이 부족하여 중국에서 수입해서 쓰고 있다고 적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시대 이후 유입된 밀은 조선시대 기장[黍] 피[稷] 차조[秫] 벼[稻] 삼[麻] 콩[大豆] 팥[小豆] 보리[大麥]와 함께 구곡(九穀)에 들 정도로 중요한 곡물이었다. 『태종실록』에서는 1415년 음력 10월16일에 “처음으로 맥전 조세법(麥田租稅法)을 정하였다. 가을에 심은 대맥(大麥)과 소맥(小麥)을 이듬해 초여름에 이르러 수확하고, 또 콩을 심으나, 예전 예에 다만 1년의 조(租)만 거두었는데, 호조(戶曹)에서 세를 두 번 거두기를 청하였다.”고 했다. 곧 보리와 밀을 늦가을에 파종을 하여 초여름에 수확을 하였다는 이야기다. 밀은 연간 평균 기온이 3.8℃, 여름철 평균 기온이 14℃ 이상인 지대에서 경제적인 재배가 가능하다. 이것을 보통 봄밀(spring wheat)이라고 부른다. 이 봄밀이 오늘날 사람들이 말하는 밀이다. 이에 비해 겨울밀(winter wheat)도 있다. 겨울에 심어서 여름에 수확하는 밀이다. 앞의 『태종실록』에서 언급한 밀은 겨울밀이다. 한반도는 봄밀이 재배되기에 적합한 기후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다 보니 겨울밀이 주로 재배되었다. 하지만 이 겨울밀도 한반도 전역에서 재배된 것은 아니다. 『세종실록』에 1419년 4월 17일자 기사에 의하면 전라도에서 보고한 다음의 내용이 나온다. “도내에는 굶는 사람이 없습니다. 보리와 밀이 모두 잘 자라기 때문입니다.”고 했다. 그렇다고 밀이 많이 재배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보리의 수확량이 많아서 굶는 사람이 적을 것이라 여겨진다. 조선초기의 농작물 사정을 파악할 수 있는 『세종실록지리지』에서 밀은 전라도 경상도 평안도 함길도에서 쌀과 콩 다음의 부세(賦稅)로 언급되고 있다. 하지만 이들 지역의 어느 곳에서도 밀은 토의(土宜)로 나오지 않는다. 아마도 그 생산량이 매우 적었기 때문에 특산물이 될 수는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1423년 6월 13일에 경기도와 황해도 지역에 밀 종자를 확보하라는 명을 내렸다. 궁중에서도 밀을 확보하여 여러 가지 밀가루 음식을 만들어야 하기에 그러한 지시를 내린 것으로 보인다. 20세기 초반에 조사된 『조선총독부농업시험장 25주년기념지』(1931년)에 의하면, 식민지시기 조선의 재래종 밀인 겨울밀은 황해도 평안남도 강원도의 일부 고원지대에서 생산된다고 밝혔다. 특히 황해도에서 그 생산량이 가장 많다고 했다. 겨울밀 중에서 그 품종이 가장 좋은 것 역시 황해도에서 재배되는 것이었다. 거의 500여 년 사이에 밀 재배 지역이 전라도에서 황해도로 이전한 것이다. 그래도 조선후기인 정조 때도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위폐를 모신 경모궁(景慕宮)에 바칠 제수인 밀을 호남에서 올리라고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조선총독부 농업시험장에서 파악하지 못한 전라도 지역과 경상도 일부 지역에서도 겨울밀이 재배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밀을 구하기 어려운 사정임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몸소 겪었던 장계향(張桂香: 1598-1680)의 『음식디미방』에는 밀가루가 들어간 음식은 무려 34회나 나온다. 심지어 술에 들어간 밀가루의 경우도 19회가 되어 모두 53회나 언급되었다. 구하기 힘든 밀을 식재료로 이용한 음식의 조리법이 이렇게 많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밀가루를 이용한 음식은 중국의 조리서에 많이 나왔고, 그것이 고급음식이란 인식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특히 송나라 이후의 예서에는 밀가루 음식이 반드시 나온다. 그들이 밀가루로 만든 음식을 항상 먹었기 때문이다. 사대부가의 가례(家禮) 절차에 대해서 주자(朱子, 1130~1200)가 지은 것으로 알려지는 『가례』의 ‘매위설찬지도( 每位設饌之圖)에서는 면식(麵食)이 미식(米食)과 함께 배치되어 있다. 이 점은 그 책을 조선 사정에 맞도록 보완한 『사례편람(四禮便覽)』에서도 마찬가지다. 다만 조선의 사정에 맞도록 면식을 ‘면(麵)’으로, 미식을 ‘병(餠)’으로 바꾸었을 뿐이다. 이런 이유도 지금도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의 불천위제사가 행해지는 음력 12월 8일의 기제사 상차림에는 ‘메’와 함께 주발에 돌돌 말아서 쌓아올린 밀가루로 만든 ‘건진국수’가 차려진다. 왕실에서도 동적전(東籍田)의 친경전(親耕田)에 밀을 심고 음력 5~6월에 왕이 직접 수확을 하는 행사를 개최하였다. 조선후기의 세시기인 『동국세시기』에서는 음력 6월 15일 유두(流頭)가 되면 밀가루로 상화병이나 연병, 그리고 유두누룩을 만든다고 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밀가루를 반죽하여 콩이나 깨와 꿀을 버무려 그 속에 넣어 찐 것을 상화병(霜花餠)이라고 한다. 또 밀을 갈아서 반죽하여 기름에 지진 다음 볏과의 여러해살이 풀인 줄〔苽〕로 만든 소를 넣는다. 혹은 콩과 깨에 꿀을 섞은 소를 넣어 여러 가지 모양으로 오므려 만든 것을 연병(連餠)이라고 부른다. 또 나뭇잎 모양으로 주름을 잡아 줄로 만든 소를 넣고 대나무로 만든 채롱에 쪄서 초장에 찍어 먹기도 한다. 이것들이 모두 유두날의 세시음식이면서 동시에 제사에 올리기도 한다.” 비록 유두쯤에 밀을 쉽게 확보할 수 있었기에 밀가루를 주재료로 만드는 ‘상화’라는 음식은 고급으로 여겨졌다. 『음식디미방』에 나오는 상화법에서는 “가장 잘 여문 밀을 보리 느무다시(애벌하듯이) 찧어 퍼 버리고 돌 없이 이매 씻어 깨끗한 멍석에 널어 알맞게 말린다. 두 번 찧어 거친 겉가루를 키로 까부르고 세 번째부터 깨끗한 가루를 가는 체에 한번 치고 가는 모시에 쳐 둔다”고 했다. 비록 도정하는 방법이 나와 있지만, 보리처럼 다루었음을 알 수 있다. 『음식디미방』의 조리법에 나오는 음식 중에서 밀가루의 양을 많이 갖추어야 하는 음식으로는 단지 상화와 다식, 그리고 약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장계향의 조리법에 근거하여 밀가루를 사용한 음식을 만들 경우, 결코 대량의 밀을 확보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밀가루를 이용한 음식의 종류가 많다는 점은 사대부가의 체통을 지키는 일이었다. 아울러 밀가루는 음식의 맛을 부드럽게 하는 데도 일조를 했다. 생선이나 고기의 냄새를 제거시켜 주는 데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밀가루를 물에 풀어서 재료로 묻히는 방법이 사용되었다. 술을 빚을 때 밀 누룩은 가장 효과적인 발효 매개물이었다. 가양주를 담기 위해서도 사대부가에서는 밀 확보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하지만 조선후기만 해도 한반도 일부 지역에서 생산된 밀은 품질도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생산량 역시 적었다. 그러니 궁중에서나 부자들만이 겨우 밀가루를 확보하여 밀가루 피로 만든 만두나, 밀국수를 만들어 먹을 수 있었다. 밀가루를 구하지 못할 때가 너무 많아서 메밀가루가 매우 중요한 가루로 여겨졌다. 그래서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아언각비(雅言覺非)』란 책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원래 맥설(麥屑;밀가루)을 진말(眞末) 혹은 사투리로 진가루(眞加婁)라 하는데, 면(麵)을 두고 음식의 이름인 국수(匊水)라고 여기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고 했다. 밀가루에 참 진(眞) 자를 붙인 이유는 곡물 가루 중에서 이것이 가장 좋다는 의미를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메밀가루는 ‘진말’에 대응하여 한자로 ‘목말(木末)’이라고 적었다. 이런 이유로 조선후기의 조리서에서는 대부분 메밀가루로 피를 만든다고 적었다. 심지어 육만두 어만두 동아만두와 같은 음식은 아예 피를 밀가루 대신에 소고기 생선 동과로 만들기까지 했다. 20세기가 되면서 한반도에서 밀 구하기는 그 전에 비해서 훨씬 수월해졌다. 그렇다고 조선총독부가 밀농사를 권장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러시아와 중국으로부터 밀을 수입하는 정책을 펼쳤다. 1910년대만 해도 한반도는 그들에게 쌀의 보급기지였기 때문에 대체 식품으로 밀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식량의 중요성을 자각한 조선총독부는 1923년 이후 재래밀의 품종 개량에 나섰다. 수원소맥6호를 필두로 하여 생산량이 많은 품종이 속속 만들어져서 농촌에 보급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한반도 사람들에게 밀은 그 전에 비해 훨씬 구하기 쉬운 식재료로 자리를 잡았다. 해방 이후 미군이 주둔하면서 그들의 땅에서 먹고 남는 밀을 무상으로 남한에 제공하였다. 특히 한국전쟁 이후 미국은 밀을 다른 정치적 이익을 챙기는 식재료로 남한 정부에 제공해주었다. 그런 탓에 195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인들은 밀로 된 음식을 대량으로 먹기 시작했다.

제작자
(사)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집필자
주영하
발행기관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원연합회
저작권자
한국문화원연합회
분야
한식[식재료]
이미지출처
한국민속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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