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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태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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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태는 식민지시기 이전부터 한반도에서 많이 먹던 생선으로 단백질 공급원이라는 영양학적 측면에서뿐 아니라 다양한 의례에서 제물로 많이 쓰이는 여러모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생선이다. 식민지시기에도 명태의 중요성은 변하지 않았다. 1936년 정문기(鄭文基: 1898-1995)는 「조선명태어(朝鮮明太魚」란 논문에서 명태를 조선인의 일상생활에 필수적인 식품이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식민지시기 조선인과 일본인은 선호하는 생선이 달랐는데 그 대표적인 생선이 바로 명태로 일본인들보다는 조선인들이 명태를 선호하고 많이 소비하였다. 그래서 192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명태어업은 조선인들이 중심이었고 일본인들의 참여는 드물었다. 그렇지만 1920년대 중반부터 일본인들이 본격적으로 명태어업에 참여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기존에 명태어업에 참여하고 있던 조선인과 일부 일본인들은 동력이 없는 무동력선으로 명태가 지나다니는 길목에 그물을 설치해 잡는 자망어업이 많았다. 이에 반해 1920년대 중반 이후 새롭게 등장한 일본인들은 대규모 자본을 가지고 있었기에 발동기를 이용해 거친 바다에도 견딜 수 있고 빠른 동력어선을 통해 명태를 잡았다. 이들은 명태 떼를 둘러싼 뒤 한꺼번에 건져올리는 수조망어업 방식을 채택하였기 때문에 장비와 기술적인 측면에서 조선인들보다 우위에 있으면서 많은 어획고를 올리기 시작했다. 자연히 명태어업에 종사하고 있던 조선인들은 생계에 위협을 느끼게 됐고 조선총독부와 명태어업이 활발했던 함경남도 당국에서도 동력선의 명탱어업을 금지하는 기간의 설정과 현대식 수조망어업을 할 수 없는 구역을 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명태의 자망어업자와 수조망어업자들 사이의 분쟁은 계속되었고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삼호항을 중심으로 발생한 명태어업분쟁이다. 1920-30년대 함경도 흥원군 삼호항(三湖港)은 당대에 전국 항구들 중 명태 어획량이 가장 많은 곳으로 400여 척에 달하는 배가 명태어업에 종사했으나 현대식 수조망어업이 등장한 이후에 1930년 1월 현재 250여 척의 배와 4천여 명의 주민들이 자망어업으로 명태를 잡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자망업자들과 수조망어업 종사자들 간 분쟁의 시작은 1929년 12월에 발생한다. 1929년 12월 23일 함경남도 홍원군 삼호항 소속 자망어선 34척이 명태를 잡기 위해 바다에 그물을 쳤고 이틀 뒤인 12월 25일 그물을 걷으러 투망한 장소에 다시 갔다. 그런데 그물들은 망가진 상태였고 그물을 설치한 장소를 표시한 표준대도 사라져 있었다. 명태 자망어선들은 발동선들이 의도적으로 어망을 끊어버렸음을 알아채고 삼호항에 들어와 흥원군 군수에게 발동선의 전횡에 대한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수조망어업자들도 자망어업자들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앞서 말한 대로 자망어업자들과 수조망어업자들은 어업구역이 달랐는데 조선총독부 수산당국은 단속선을 파견하여 수조망어업자들이 자망어선 조업구역 내에서 명태를 잡지 못하도록 했다. 그래서 수조망어업자들은 자망어업자들만 명태를 많이 잡아간다고 여겨 이전부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마침 단속선이 잠시 철수해 있는 틈을 타서 일제히 자망어선들이 던져놓은 그물을 끊어버린 것이다. 이때 단순 피해액만 약 2만 원에 달했고 잡지 못한 명태까지 포함하면 3만 원이 넘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거금의 피해가 발생했다. 자망어업자들의 항의는 군수를 넘어 조선총독부로까지 이어졌는데 1930년 2월 27일 총독부 식산국장, 28일 총독부 수산국장을 방문하여 피해상황을 진정하고 대책을 요구하였다. 1930년 3월 29일 홍원군뿐 아니라 전진이란 지역에서도 자망업자들이 수조망업자들에 대한 규제를 촉구하는 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렇지만 수조망업자들과의 경쟁에서 견디기 힘들었던 조선인 자망어업자들 가운데 자본력이 있는 이들은 동력선을 구입하고 수조망어업으로 어업형태를 바꾸면서 사회 경제적 변화에 대응하였다.

제작자
(사)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집필자
이민재
발행기관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원연합회
저작권자
한국문화원연합회
분야
한식[식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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