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화

“달밤에는 그런 이야기가 격에 맞거든.” 조선달 편을 바라는 보았으나 물론 미안해서가 아니라 달빛에 감동하여서였다. 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을 가제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붓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칠십 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달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모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길이 좁은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타고 외줄로 늘어섰다. 방울 소리가 시원스럽게 딸랑딸랑 모밀밭께로 흘러간다. 앞장선 허생원의 이야기 소리는 꽁무니에 선 동이에게는 확적히는 안 들렸으나, 그는 그대로 개운한 제 멋에 적적하지는 않았다. 1936년 월간 종합지인 <조광>에 발표된 이효석의 단편소설이다. 발표 당시의 제목은 ‘모밀꽃 필 무렵’이었다. 이효석(李孝石: 1907-1942)은 경성제국대학 영문과 2학년이던 1928년 사회주의적 성향을 띤 종합지 <조선지광>에 단편 「도시와 유령」을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동대문 밖 동묘에 살고 있는 거지 모자의 현실과 이를 알게 된 주인공의 충격을 엮어 짠 작품인데, 청년 사회주의자의 소련 밀항을 그린 「노령근해」 3부작과 함께 이효석 문학의 초기 경향을 잘 보여준다. 사회주의에 기울어 있지만 사회주의자 문학예술인들의 조직이었던 KAPF에 가담하지는 않은 작가들을 우리 문학사에서는 동반자 작가로 부르는데, 등단 초기의 이효석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이후 방향을 바꾸어 이 시기 순수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몸을 세우게 된다. 대표작에 「노령근해」, 「돈」, 「메밀꽃 필 무렵」, 「장미 병들다」, 「하얼빈」 등의 단편, 「화분」, 「벽공무한」 등의 장편이 있다. 「메밀꽃 필 무렵」의 한복판에는 달밤의 메밀꽃밭 풍경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이 소설을 한국 근대 단편소설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밀어올린 풍경이다. 이 아름다운 풍경 속에는 그러나, 풍경의 아름다움에 눈 멀면 볼 수 없는 주인공 허생원의 남루한 존재성이 들어 있다. 당대 한국사회에서 불구로 인식되었던 왼손잡이에 얼금뱅이라는 육체적 불구, 나귀 한 마리를 반려 삼아 떠도는 외로운 신세, 몇 푼의 이문을 바라 밤새워 강원도 험한 산길을 걸어야 하는 고단한 하루하루 등이 그의 남루한 존재성을 구성한다. 또 있다. 그가 성으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된 외로운 존재라는 사실이 그것이다. 허생원이 기억 속에서 성 처녀와의 하룻밤을 거듭 불러내어 되새기는 것은 역으로 그가 얼마나 성으로부터 소외된 존재인가를 드러낸다.
- 제작자
- (사)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 집필자
- 정호웅
- 발행기관
-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원연합회
- 저작권자
- 한국문화원연합회
- 분야
- 한식[문학]
- 이미지출처
- 한국민속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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