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화

다래는 보통 7~8월에 생산되는데, 생으로 오래 보관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오래 두고 먹기 위해서 제철에 정과를 만들어 두고 먹었다. 1766년에 유중림(柳重臨: 1705-1771)이 엮은 농서인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에서는 ‘산포도전법(山葡萄煎法)’이라 하여 산포도를 끓여서 꿀을 섞어 만드는 법을 설명하였다. 여기서 다래와 들쭉열매로도 만들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만드는 방법은 잘 익은 열매를 시루에 쪄서 말리고, 물과 꿀을 반씩 넣어 꿀물을 만들어 쪄서 말린 열매를 넣고 약불로 조린 후 말린다. 그 후 따로 달여 낸 꿀을 넣고 조려서 완성하는데, 이 방법은 일반적인 정과를 만드는 방법과 동일하다. 다래는 궁중에서도 활용되던 식재료이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인조 25년 정해(1647) 10월 7일의 강원도의 봉진관(封進官)을 추고할 것을 청하는 사옹원 도제조의 계에 다래와 관련된 내용이 있다. ‘강백년이 사옹원 관원이 전하는 도제조의 뜻으로 아뢰기를, “강원도에서 10월에 새로 난 것으로 양전(兩殿)과 세자궁에 진상한 …(중략)… 중궁전에 올린 머루정과[山葡萄正果]는 2두(斗) 중에 1승(升)이, 다래정과[獮猴萄正果]는 3두 중에 3승이 축나 있었습니다. 막중한 어선(御膳)을 태만하고 소홀히 봉진(封進)하였으니 너무도 놀랍습니다. 본도(本道)의 봉진관(封進官)을 추고하고 이를 운송해 온 사람은 조심하지 않은 죄를 면하기 어려우니, 유사로 하여금 수금하여 엄중히 다스리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는 다래 자체를 진상한 것이 아니라 다래를 정과로 만들어 진상한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도 ‘미후정과’에 대한 내용이 있는데, 선조 26년 8월 13일 ‘제독은 미후정과(獮猴正果) 한 접시만을 마셨다’는 내용의 기록이 있다. 보통 중국 장수가 우리나라에 왔다가 중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리나라 지방의 관료들이 중국의 장수를 접대하는 관례가 있었는데, 대부분의 지방에서 대접하지 않았다는 보고가 있었다. 그러던 중 ‘운익이 아뢰기를, “이해수(李海壽)의 말을 들으니, 제독이 용천(龍川)에 당도했을 적에 어렵게 호란(糊亂)을 구하여 올리었으나 제독은 미후정과(獮猴正果) 한 접시만을 마셨다고 하였습니다.”’고 하였다. 아마도 다른 음식은 먹지 않고 미후정과만을 먹은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미후정과 한 접시를 마셨다’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꿀을 넣고 졸인 고형의 정과라기보다는 다래로 만든 수정과의 제형인 것으로 생각된다.
- 제작자
- (사)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 집필자
- 홍진임
- 발행기관
-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원연합회
- 저작권자
- 한국문화원연합회
- 분야
- 한식[음식]
- 이미지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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