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문화사전

국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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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는 한자어로는 ‘면(麪)’, ‘면자(麪子)’라고 하며, 밀, 메밀, 감자 등의 가루를 반죽하여 얇게 밀어서 썰거나 국수틀로 가늘게 뺀 음식, 또는 그것을 삶아 국물에 말거나 비벼서 먹는 음식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의 전통 국수는 재료에 따라서 밀국수, 메밀국수, 녹말국수 등 다양한 종류가 있으며 국수를 사용한 요리는 국수장국, 냉면, 비빔국수, 칼국수 등으로 구분된다. 국수는 오늘날 평소에 먹을 수 있는 상용 주식으로 널리 보급되어 있으나, 전래생활에서는 특별한 경우에만 맛볼 수 있는 음식이었다. 조선시대의 『세종실록(世宗實錄)』 수륙재(水陸齋) 때에 정면(淨麵)을 공양 음식으로 올렸다는 설명이 나온다.(세종 2년(1420년) 9월 22일). 조선왕조에서 궁중연회를 베풀 때의 준비절차와 연회음식의 내용을 수록한 『진찬의궤(進饌儀軌)』, 『진연의궤(進宴儀軌)』에 의하면 1719년부터 1902년 사이에 17회의 연회가 있었는데 1827년 이후로 국수장국이 빠짐없이 등장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1848년부터는 국수장국 외에 따로 건면(장국에 말지 않은 국수)을 음식을 높이 고이는 고임상에 놓았다. 일반인들의 생활 속에서도 국수는 생일, 회갑연, 혼례 등 특별하고 경사스러운 날에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기다란 면발이 장수를 상징한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고 특히 혼례 때는 신랑신부의 인연이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없어서는 안 될 음식으로 여겨져 왔다. 예로부터 여러 가지 잔치에서 국수를 대접했던 것이 유래가 되어 국수는 잔칫집의 대표음식이 되었고 잔치국수라고도 불리게 되었다. 오늘날, 언제 결혼할 거냐고 물을 때 ‘언제 국수를 먹여줄 거냐’ 라고 묻는 것도 이러한 연유로 생겨났다. 국수는 고려시대에 이미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서긍(徐兢: 1091-1153)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는 ‘10여 종류의 음식 중 국수 맛이 으뜸이다(食味十餘品而麪食爲先)라는 말이 나오고, 고려에는 밀이 귀하기 때문에 성례(成禮) 때가 아니면 먹지 못한다고 하였다. 『고려사(高麗史)』의 예조와 형조에서 ‘제례에 면을 쓰고 사원에서 면을 만들어 판다’라는 말이 보인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시대에도 국수가 있었으며 상품화도 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사십이집(攷事十二集)』에서는 ‘국수는 본디 밀가루로 만든 것이나 우리나라에서는 메밀가루로 국수를 만든다’ 고 한 것으로 미루어 중국의 국수와는 달리 오래 전 한반도에서는 국수를 만들 때에 밀가루 외에 메밀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국수에 관해서는 구체적인 자료가 없어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조선시대 이후, 국수에 관해서는 적지 않은 기록이 남아있다. 국수를 만드는 법에 대한 설명이 보이는 문헌은 조선 중기, 허균(許筠: 1569-1618)이 쓴 『도문대작(屠門大嚼)』(1611년)이 있다. 여기서는 사면(絲麵)이라는 이름으로 메밀가루를 사용한 실국수를 소개하였는데 '絲麵則有吳同者善造(실국수는 오동이라는 사람이 잘 만들어 지금까지 전해온다)'라고 하였다. 장계향(張桂香: 1598-1680)이 1670년 경 저술한『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을 보면 '난면(卵麵)'과 같이 밀가루와 계란을 섞어 면을 만드는 방법도 나와 있으나, 메밀가루, 녹말, 녹두가루를 섞는 제면법이 비교적 많이 소개되어 있다. 1600년대 말기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저자미상의 『주방문(酒方文)』의 '누면(漏麵)'은 면을 만들 때 밀가루를 사용하기는 하나 녹말과 섞어 쓰고 있고 그 외 '면(麵)'이라는 명칭으로 메밀가루, 녹두가루, 쌀가루를 사용하는 제면법을 기록하였다. 1809년 빙허각 이씨(憑虛閣 李氏: 1759-1824)가 쓴 『규합총서(閨閤叢書)』에는 『음식디미방』과 같은 '난면'이 등장한다. 1800년대 말엽에 출간된 저자미상의 『시의전서(是議全書)』를 통해서는 조선시대에 상당히 다양한 면요리가 존재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 책의 기록에 의하면, 녹두, 팔, 송화, 칡뿌리, 수수, 율무, 메밀, 밀, 녹말가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서 만든 면이 있었으며 먹는 때에는 육수장국, 동치미국물, 참깨국, 콩국, 오미자국, 꿀물에도 말아 먹었다. 이와 같이 다양한 재료와 조리법이 기록에는 남아 있으나,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국수의 주된 재료는 메밀이었다. 메밀은 예로부터 한전(旱田)에서 재배하던 작물로, 한반도에서 전통적인 국수라고 하면 메밀로 만든 국수가 주류였다. (윤서석, 2001) 세종대왕 때에는 궁중에서 소비되는 메밀의 양이 상당히 많았다고 전해진다. 진공물(進貢物)로 나라에서 거두어들이는 것만으로는 수요를 충당하지 못해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에 205섬을 더 할당시킬 정도로 메밀 소비가 많았다. (김상보, 2006) 궁중에서도 메밀국수를 즐겨 먹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즉, 조선시대의 국수는 메밀을 주재료로 사용하였고, 밀국수는 잔치음식 또는 여름철 별미로 먹었던 것이었다. 조선시대, 국수를 만드는 방법도 여러 가지였는데, 크게 면본이라고 하는 틀에서 국수를 뽑아내는 방법, 구멍이 뚫린 바가지에 반죽을 밀어 넣어 뽑는 방법, 반죽을 밀대로 넓적하게 밀어 도마에 놓고 써는 방법 3 가지로 분류된다. 1915년에 일본인 오카 료스케(岡良助)에 의해 저술된 『경성번창기(京城繁昌記)』에는 국수를 만드는 모습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조선인은 종래의 메밀면 만을 먹으며 그 제조 및 판매는 기계에서 떨어지면 동시에 끓고 있는 솥의 물에서 끓여서 판매하고 있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김상보, 1997) 조선통감부의 기관지 <경성일보>의 기자로 조선에 와 있던 일본인 우스다 잔운(薄田斬雲, 1877-1956)이 1909년에 쓴 『조선만화(朝鮮漫畵)』의 글 ‘국수집’에서는 조선의 국수틀에 대하여 조금 더 자세한 묘사를 볼 수 있다. “조선의 음식점에는 어느 곳을 보아도 국수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국수를 좋아하는 국민으로 보인다. 국수는 눈과 같이 하얗고 일본의 소면이나 말린 국수보다도 훨씬 희다. 어느 음식점이라도 음식점마다 한 구석에 국수를 제조하는 장소가 있어서 밖에서 보인다. 온돌집이기 때문에 국수 제조기계가 놓여 있는 곳은 낮에도 어둡다. 밑에는 큰 가마솥의 물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 장작에 불을 지폈기 때문에 연기가 검게 올라온다. 솥(가마솥) 위에는 커다란 두꺼운 조판(俎板) 모양의 물체가 있고, 이 물체에는 5,6촌(寸) 정도의 구멍이 뚫려 있다. 이 구멍에 국수반죽을 넣는다. 위에서 절구공이를 내려 누르면 밑에 망이 있어서 이 망으로 국수가 실 모양으로 따라 내려와 끓고 있는 가마솥에 떨어진다. 하얗게 거품이 생기면서 끓는다. 이것을 퍼서 물에 넣는다. 드디어 백색의 상등 국수가 완성된다. 지레에 등을 대로 누워 다리를 천정에 대포 버틴다. 지레가 내려가서 발이 천정에 닿지 않게 되면, 기둥에 고정시킨 횡목(橫木)에 발을 대고 버틴다.” 위 글에서 나오는, 밀을 사용한 새하얀 국수가 한반도에서 대중화 된 것은 밀 재배가 본격화 된 일제강점기 이후이다. 특히,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잉여농산물인 원조밀가루가 저렴하게 공급되면서 오늘날과 같이 밀가루로 만든 국수가 널리 보급되었고 그 옛날의 잔치음식이 아닌, 소박하고 대중적인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멸치로 국물을 낸 국수가 보급되면서 명칭도 잔치국수 외에 멸치국수, 장터국수와 같은 대중적인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국수는 전국 각지에서 생산되는 갖가지 재료를 이용한 향토음식으로도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경상남도에는 멸치장국에 된장을 풀어 국물 맛을 낸 된장국수, 제주도에는 된장을 넣은 멸치장국에 볶은 표고버섯과 소고기 완자를 얹어 내는 표고버섯국수(초기국수)가 있다. 강원도 지역에서는 도토리전분으로 면을 만들어 도토리올챙이국수(올챙이국수), 옥수수 전분으로 만든 면에 콩물을 넣어 옥수수콩물국수도 만들어 먹는다. 서울‧경기도 지역에서는 밀국수에 잣을 갈아 만든 국물을 부어서 잣국수를 해 먹고,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는 들깨칼국수는 전라북도의 향토음식에 해당한다.

제작자
(사)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집필자
박경희
발행기관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원연합회
저작권자
한국문화원연합회
분야
한식[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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