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화
1724년 경종이 게장과 감을 먹고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다. 붕당이 격렬해지던 상황에서 정치적 주도세력을 교체하는 환국을 통해 왕권을 강화시키던 숙종을 이어 왕위에 오른 이는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이었다. 새로운 왕이 즉위하였지만 노론과 소론을 중심으로 한 정권다툼은 끓이지 않았다. 오히려 경종이 즉위한 이후 당시 정치적 주도권을 잡고 있던 노론과 그 주도권을 빼앗고자 하던 소론 사이의 다툼은 더욱 격화되었다. 그 과정 속에서 경종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훗날 영조가 되는 연잉군이 왕세제로 책봉되었고 왕세제에 의한 대리청정을 시행해야 된다는 노론 측 신하들의 주장도 있었다. 이렇게 경종 즉위 후에도 노론이 정치를 주도하던 상황 속에서 목호룡의 고발로 촉발된 신임사화로 소론이 정치 주도권을 잡게 된다. 격변하는 상황 속에서 1724년(경종 4) 7월 가벼운 감기증상으로 시작되었던 몸 상태가 8월에 들어서는 매일 이루어지던 간단한 조회인 상참(常參)과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서 중요시되던 경연(經筵)까지도 하지 않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당시 경종은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잠도 잘 수 없었으며 계속적으로 추위를 느끼고 있었다. 경종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궁중의 여러 의원들이 다양한 약을 썼지만 그 효과는 미미했다. 그러던 중 1724년(경종 4) 8월 20일 저녁식사에 게장[蟹醬]과 생감[生柿]을 올렸는데 먹고 난 이후 밤부터 가슴과 배가 비틀리듯이 아팠고 그 이후로는 심한 설사가 계속된다. 의원들은 설사를 멈추고 설사로 인해 탈진한 경종의 기운을 북돋우기 위해 인삼과 조로 만든 미음도 먹이고 설사를 멈추기 위한 약을 올렸지만 그 증상이 회복되지 않고 거의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악화만 되었다. 8월 24일 해가 질 무렵 경종의 증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의원들이 급히 진찰하였는데 인삼차를 쓰려는 다른 의원들과 달리 당시 의약청에서 일하던 이공윤(李公胤:)은 설사를 멈추기 위해선 다른 약제를 써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계피나무의 어린가지를 말려 다른 약재와 섞은 계지마황탕을 올리고자 했으나 인삼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던 왕세제가 그의 처방을 허락하지 않고 오히려 꾸짖으면서 쓰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왕세제의 말대로 인삼차를 쓴 후 콧잔등의 온기가 따뜻해지는가 싶었으나 결국 경종은 8월 25일 승하한다.
경종의 죽음 후 왕세제였던 영조는 경종의 뒤를 이어 제 21대 조선의 왕에 오르지만 경종의 죽음에서 쉬이 벗어날 수는 없었다. 대표적으로 영조가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1728년(영조 4)에 소론과 남인 과격파들이 일으킨 이인좌의 난과 1755년(영조 31)에 소론이 노론 일파를 제거할 목적으로 일으킨 역모사건인 나주괘서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나주괘서 사건이 발생한 같은 해 5월 심정연(沈鼎衍: ?-1755), 신치운(申致雲: 1700-1755) 등이 역모를 일으키려다 발각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국문 도중 신치운은 스스로 자신이 역모할 생각이 있었음을 고하면서 영조가 즉위한 1724년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다는 말을 했고 그 말을 들은 영조는 분통을 터트리며 눈물을 보였다. 이후에도 영조는 경종의 죽음과 게장에 대해 신하들에게 직접 이야기했을 정도로 경종의 죽음에 자신을 연관시키는 것에 대해 분노했다.
19세기 빙허각 이씨가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규합총서』 동경대본에서는 게에 대해 논하면서 홍시와 게를 같이 먹으면 곽란과 설사가 온다고 경고하고 있다. 『산림경제』를 보면 『사시찬요』를 인용한 게장 담그는 법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방법은 다음과 같다. 우선 생게[生蟹]를 부드렇게 빻은 후 장과 살을 짜내어 엉기게 한 후 찐다. 그리고 그것을 자루에 넣어 장독에 담그면 맛이 좋다고 했다.
- 제작자
- (사)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 집필자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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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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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문화원연합회
- 분야
- 한식[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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