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화
곶감은 껍질을 벗긴 감을 말린 음식을 말한다. 한자로는 건시자(乾柿子), 건시(乾柿), 시저(柿諸), 시병(柹餠) 등으로 표기한다. 곶감은 세시(歲時) 때 시절(時節)음식, 제사 혼례 등 의례에 많이 쓰였기에 각종 문집과 서찰 등을 살펴보면 선물로도 자주 주고 받았던 물품 중 하나임을 알 수 있다. 민간에서 선물 뿐 아니라 사신들을 통해 외국에 보내는 선물로도 보냈다. 특히 명나라 청나라 등 사신들이 왔을 때 황제에게 보내는 선물로도 자주 갔는데 세종실록 1430년 음력 12월 11일 기사에 명나라 사신으로 조선에 온 창성(昌盛: 1381-1438)이 석화(石花), 대하(大蝦)와 함께 곶감을 요구했는데 이 요청에 응하라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고종 때인 1875년 음력 5월 2일 승정원일기 기사에 예조에서 고종에게 1875년 3월에 효철의황후(孝哲毅皇后: 1854-1875)의 죽음을 위로하는 진향사(進香使)가 갈 때 같이 보내는 물건에 대해 보고한다. 예조의 보고에 따르면 원래 진향사가 갈 때 제수(祭需) 물품으로 곶감을 같이 보내는데 곶감이 가는 길에 부패하기 쉬워 건륭제(乾隆帝: 1711-1799)와 도광제(道光帝: 1782-1850) 때부터 곶감을 개암으로 바꿔 보냈다. 그래서 이번 진향사가 갈 때도 곶감 10첩 대신 개암 10두를 준비했음을 고종에게 보고한 것이다. 이는 곶 건륭제 이전까지 진향사가 갈 때는 곶감을 청나라 황실에 제사에 쓸 물건으로 바쳤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단맛을 내는 음식이 지금보다 적었던 조선시대에 곶감은 단맛을 내는 음식으로 귀한 대접을 받았다. 이익(李瀷: 1681-1763)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말린 여지가 연홍수시(軟紅水柹)를 말려 만든 곶감 보다 그 맛이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막 따온 여지(荔支)를 먹어보지 못했지만 그 맛이 역시 연홍수시 보다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익이 그만큼 곶감을 높게 평가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글쓴이에 따라 곶감 생산지로 유명했던 지역들은 조금씩 다르지만 곶감으로 유명한 지역들은 주로 남쪽 지방에 위치했다. 허균(許筠: 1569-1618)는 「도문대작(屠門大嚼)」에서 지리산에서 생산되는 검푸른색에 둥글고 끝이 뾰족한 오시(烏柿)는 그냥 먹어도 맛이 좋지만 꼬챙이로 꿰어 곶감으로 만들어 먹으면 더욱 괜찮다고 했다 성호사설에서는 영남의 여러 고을에서 감나무를 재배해 곶감을 판다고 했다.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은 임하필기에서 풍기(豐基) 은풍면(恩豐面)에서 만들어진 곶감이 가장 좋다고 하면서 은풍면 사람들은 많은 종류의 단 음식 중에서 풍기 곶감만 한 것이 없다고 말한다고 하면서 그 말에 비춰볼 때 풍기 은풍면 곶감은 세상에서 가장 좋다고 할 수 있을 정도라고 칭송했다. 곶감은 당연히 그 자체로 맛있는 먹을거리이지만 수정과, 두텁떡, 증편, 곶감죽 등 다양한 음식을 만드는 재료로도 쓰였다. 예를 들어 보면 우선 『식료찬요(食療纂要)』에 보이는데 달콤한 맛의 별미로 먹는 음식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환자식이었다. 아이의 이질[秋痢]을 치료하기 위해 곶감죽을 쑬 때는 쌀죽을 끓이다가 익을 즈음에 약간 갈아둔 곶감을 넣어서 서너 번 끓어오른 뒤 먹이고, 소리를 잘 듣지 못하는 증상과 냄새를 잘 맡지 못하는 증상을 낫게 하려면 곶감 세 개를 잘게 썰고 멥쌀 세 홉을 감즙에 넣어 죽으로 끓여서 공복에 먹으라는 것이다 동의보감 에서도 본초강목(本草綱目)을 인용하면서 곶감이 연유와 꿀을 함께 달여 먹으면 음식을 잘 소화시키지 못하는 것을 치료해준다고 했다 농정회요에는 곶감을 이용해 만든 두터운 떡[厚餠]을 떡을 소개하면서 옛날 기이한 스님 중 한명이 미리 곶감, 말린 밤, 대추, 호두 등을 찧어 만든 두터운 떡을 많이 모아두었다가 흉년을 이 떡을 먹으면서 버텨냈다는 이야기에 대해서도 기록했다.
- 제작자
- (사)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 집필자
- 이민재
- 발행기관
-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원연합회
- 저작권자
- 한국문화원연합회
- 분야
- 한식[음식]
- 이미지출처
- 한국민속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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