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화
서울 음식의 특징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지만 ‘담백’과 ‘절제’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할 것 같다. 좋은 재료를 가려 쓰되 양념을 과하게 넣지 않고 간도 삼삼하게 해 느끼하지 않고 산뜻한 맛을 내기 때문이다.
서울 토박이인 외가 음식 중에 가장 좋아하던 것은 겨울에 끓여먹는 곱창배춧국이다. 집집마다 김장하는 날에 먹는 음식은 대개 정해져 있게 마련인데 외할머니도, 어머니도 김장하는 날에는 꼭 곱창배춧국을 한 솥씩 끓여내셨다.
달큼한 배추와 고소한 곱창이 어우러진 뜨끈한 한그릇
우선 곱창을 잘 손질해 소고기 사태와 함께 푹 무르도록 삶는다. 그대로 하룻밤 두고 다음날 보면 굳기름이 위에 엉겨 있다. 이걸 걷어내면 맑은 국물이 남는다. 개운하게 먹으려면 기름을 다 걷어내야 하지만 조금 남기면 다 끓였을 때 기름이 동동 뜨고 맛은 더 구수해진다.
소고기 사태는 모양을 살려 얇게 썰고 곱창은 한 입 크기로 썬다. 소고기국에는 양지와 사태를 많이 사용하는데 양지는 쪽쪽 찢어 넣고 사태는 칼로 썰어야 제 맛이다. 배춧국은 개운하게 먹는 국이라 기름이 많은 양지보다는 담백한 사태가 더 잘 어울린다.
배추는 노란 속대만 사용하는데 많이 넣을수록 좋다. 푹 무르면 의외로 건더기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배춧잎이 큰 것은 길이대로 칼로 죽죽 그어가며 3등분하고 먹기 좋게 어슷 썬다.
솥에 국물을 붓고 팔팔 끓이다가 된장과 고추장의 비율을 3:1로 해서 거름망에 걸러 풀고 배추를 넣는다. 배추가 나른하게 익으면 다진 마늘과 큼직큼직하게 썬 대파를 넣고 썰어두었던 사태와 곱창을 넣어 펄펄 김이 오르도록 끓인다. 밥을 말아 막 담근 겉절이 김치나 굴이 듬뿍 들어간 무채 양념을 얹어 먹는다. 며칠을 내리 먹어도 물리지 않았다. 그만큼 맛있었다.
뜨거운 밥 위에 듬뿍 얹어 달래장에 비벼먹던 생굴의 향기
굴 철이 오면 그리워지는 음식이 있다. 외할아버지가 좋아하셨던 굴밥은 다른 집과 좀 달랐다. 원래 굴밥은 솥에 불린 쌀을 안쳐 밥을 짓다가 마지막에 굴을 얹고 뜸을 들인다. 굴이 살짝 익어 봉긋하게 부풀어 오르면 그릇에 퍼서 양념간장을 비벼먹는다. 외가에서는 흰쌀로 지은 뜨끈한 밥에 물기를 쪽 빼놓은 굴을 듬뿍 올려 생것 그대로 비벼먹는다. 노지달래를 잘게 썰어 넣은 양념간장을 곁들이면 딱 좋다.
굴 비린내가 난다고? 전혀. 오히려 생굴의 향기를 오롯이 느낄 수 있다. 원래도 자연산 굴을 못 따라가는 것이 양식산 굴의 향이지만 이때만큼은 반드시 알이 작은 자연산을 써야 한다. 그래야 뜨끈한 밥에 굴이 제대로 어우러진다. 양식산을 쓰더라도 알이 작은 것이 좋다. 알이 굵은 굴은 밥과 잘 엉기지도 않고 입에서 따로 놀아 제 맛이 안 난다. 서해안 것이 좋은데 어리굴젓을 담그는 충남 태안 자연산 굴이나 진석화젓을 담그는 전남 고흥산 양식굴이 좋다.
꾸미를 따로 얹어 화려하다, 빈대떡
명절에 먹는 전 중에서는 빈대떡을 제일 좋아했다. 그런데 요즘은 빈대떡 맛이 예전 같지 않은 것인지, 입맛이 변한 것인지 별 감흥이 없다. 아마 어린 시절에 먹었던 그 빈대떡과 모양부터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글만 읽는 남산골샌님의 딸이었던 외할머니는 손끝이 매웠다. 정말 남산골에서 나고 자란 외할머니가 만들어주셨던 음식 중에 제일 예뻤던 음식이 빈대떡이었다. 외할머니는 녹두 간 것을 한 국자 얹어 지질 때 돼지고기, 씻은 김치, 고사리, 대파 등을 모두 따로 양념해 얹었다. 마지막에 실고추를 얹는 것도 잊지 않으셨다.
고기도 싫고, 대파는 더 싫었던지라 새콤한 김치조각만 쏙쏙 빼먹곤 했는데 어머니도 어린 시절에는 김치만 빼먹었노라 하신다. 크게도 부치지 않고 4등분 하면 딱 한입에 넣기 좋았던 빈대떡. 명절 끝에는 남은 빈대떡을 모아 넣고 고추장 풀어 얼큰한 찌개를 끓여주셨는데 빈대떡이 풀어져 걸쭉해진 국물을 떠 밥에 비벼 먹는 맛도 참 좋아했던 것 같다.
보리굴비는 녹찻물 만 밥이 아닌 숭늉에 얹어 먹어야 제 맛
우리 집에서는 굴비를 참 많이 먹었다. 조기 철이 되면 외할머니는 연평도 조기를 들여다 놓고 조기젓도 담고 굴비도 말리시곤 했다는데 그건 어머니 기억 속의 일. 어렸을 적 기억에 따로 굴비를 만드는 걸 본적은 없지만 여름 내내 굴비 두름을 장독대 근처 처마에 걸어놓고 한 마리씩 가져다가 구워도 먹고, 쪄도 먹었던 기억은 선명하다.
그때는 정말 굴비가 커서 30cm 정도는 너끈했다. 귀한 줄 모르고 먹었던 그 맛을 못 잊어 어른이 되고 기억 속의 굴비를 찾아 산지를 찾아다니고 재래시장을 기웃거렸지만 사춘기 이후로는 그런 굴비를 만나지 못했다. 굴비를 구울 때 올라오던 그 연기의 냄새도 다시는 맡지 못하고 있다. 아쉽다.
굴비 두름에 엮여 걸려있던 굴비는 배가 많이 꺾인 모양이었다. 지금 볼 수 있는 굴비는 얼 말려 냉동시킨 상태로 유통시키는 탓에 배가 굽도록 공중에 매달릴 일이 없는 모양인지 모두 반듯반듯하다. 크기는 말할 것도 없다. 도무지 먹을 게 없다. 살은 또 왜 그렇게 부스러지는지.
아쉬운 마음에 몇 년 전부터 작은 쌀독을 하나 비워 보리굴비를 직접 만들었다. 보리쌀을 쌀독에 붓고 굴비를 한 켜 얹은 다음 다시 보리쌀을 붓고 굴비를 얹는 식으로 하다가 마지막에 보리쌀을 덮어 공기와 통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원래 보리굴비는 1년 정도는 그대로 두어야 한다. 그래야 굴비에서 배어 나온 기름이 보리에 옮겨 가 보리는 거무스름해지고 굴비는 잘 말라 등이 굽은 모양이 된다. 제일 오래 보관해둔 것은 3년이 지난 것. 꺼내보면 굴비는 돌처럼 굳어 딱딱해져 있고 보리가 달라붙어 손으로 털어가며 떼야 한다.
이 굴비는 쌀뜨물에 하루 불려 물을 조금 붓고 쪄먹는다. 다진 마늘을 넣으면 굴비 맛을 해치니 참기름 조금 둘러주면 그뿐이다. 마지막에 매운 고추 하나 썰어 올리면 알싸하니 잘 어울린다. 사람들은 녹차물에 만 밥에 보리굴비를 올려먹는다는데 내 입맛에는 구수한 눌은밥이 훨씬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제대로 만든 보리굴비는 쪄서 익혀도 살이 부스러지거나 흐트러지지 않는다. 길이대로 쪽쪽 일어나는데 씹을 때는 제법 질깃질깃하다. 오래 보관해두었던 마른 오징어 비슷한 콤콤한 맛이 난다.
아버지가 매일 끓여주시던 곡삼차
겨울이 되면, 아버지는 매일 인삼차를 끓이셨다. 마루에 있던 난로위에 자그마한 주전자를 얹어두고 인삼, 대추, 생강을 넣어 보글보글 끓여주시던 인삼차. 그때는 홍삼을 먹지 않고 모두 수삼을 말린 인삼을 먹었다. 수삼의 껍질을 벗겨 그대로 말리면 직삼이고 구부려서 말리면 곡삼이다. 우리는 직삼도 먹고 곡삼도 먹었지만 주로 곡삼을 많이 썼다.
매일 저녁, 퇴근한 아버지는 식구대로 앉혀놓고 인삼차를 졸졸 따라 한 컵씩 마시게 하셨다. 아이들 입맛에 맞추느라 설탕을 조금 타 살살 저어주시면 홍옥이나 국광 사과를 아삭아삭 베어 먹으며 그 곡삼차를 마시곤 했다. 따로 보약을 많이 먹지는 않았지만 그 시절에 꾸준히 먹었던 곡삼차 덕을 지금까지 보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지 싶다.
전국 팔도 토속음식을 찾아 기록하는 일을 해오고 있지만, 정작 내 부모, 조부모의 고향인 서울 음식에는 손을 대지 못했다. 그저 집에서 먹었던 음식들을 떠올려보고 아쉬워할 뿐이었다. 이제는 여든 넘은 어머니의 기억 속 음식을 끄집어내어 다시 만들어보고 기록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중부시장에서 사다 먹던 두툼한 대구포는 이십년 째 찾아보아도 영 찾을 수가 없다. 경동시장, 남대문시장을 수시로 들락거려보아도 그 옛날 식재료들을 구하기가 너무 힘들다. 속상하다. 그래서 더 그립다. 서울의 옛 음식이.
1. 곱창은 소금과 밀가루를 뿌리고 치대서 씻은 다음 흐르는 물로 헹궈 물기를 뺀다.
2. 곱창과 사태를 1시간 정도 삶은 다음 잠시 두면 기름이 굳는다.
3. 깔끔한 국물을 얻으려면 굳은 기름을 모두 건져 버리고 고소한 맛을 살리려면 조금 남긴다.
4. 곱창과 사태를 건진다.
5. 사태는 모양을 살려 얇게 썰고 곱창은 한입 크기로 썬다.
1. 배추는 노란 속대만 뜯어서 흐르는 물에 씻어 건져 물기를 뺀다.
2. 배추는 길이대로 칼로 썬 다음 사선으로 3등분해 썬다.
3. 배추는 푹 무르면 부피가 줄어들기 때문에 넉넉하게 넣는 것이 좋다.
4. 육수가 펄펄 끓으면 된장과 고추장을 풀고 배추를 넣어 끓이다가 배추가 반 정도 익으면 썰어두었던 곱창과 사태고기를 넣어 푹 무르도록 마저 끓인다.
5. 달큼한 배추의 맛과 곱창의 고소한 맛이 어우러진 곱창 배춧국.
1. 굴은 소금물에 흔들어 씻어 건진다. 세 번 정도 헹구는데 그때마다 소금물을 쓴다.
2. 노지 달래는 뿌리 부분의 지저분한 것을 잘 떼어내고 시든 잎을 정리한다.
3. 달래의 머리 부분을 칼등으로 두드리고 잘게 썬다.
4. 밥이 뜸이 들면 그릇에 퍼 담고 씻어두었던 생굴을 올린다.
5. 달래에 간장, 고춧가루, 통깨, 참기름을 넣어 양념한 달래장을 곁들여 비벼 먹는다.
1. 잘 마른 치자를 흐르는 물에 씻어 물을 넉넉하게 붓고 하룻밤 두어 색을 우린다.
2. 불린 녹두와 쌀의 비율을 7:1 정도로 섞어 곱게 간 다음 소금 간을 살짝 하고 팬에 한 국자씩 떠 넣어 지진다. 미리 양념해두었던 돼지고기, 고사리, 대파, 씻은 김치, 실고추 등을 올린 다음 조심스럽게 뒤집어 마저 지진다.
4. 빈대떡은 어른 주먹보다 조금 큰 크기로 지져야 4등분했을 때 한입 크기로 적당하다.
5. 양파와 배를 갈고 간장, 고춧가루, 다진 마늘 등을 넣은 양념장을 넣어 조린 돼지갈비찜.
5. 달래장으로 비빈 굴밥에 매콤한 돼지갈비찜을 곁들인다.
1. 옹기 바닥에 보리를 한 켜 깔고 마른 조기를 얹은 다음 보리로 덮는다. 같은 방법으로 보리와 조기를 한 켜씩 번갈아가며 넣은 다음 맨 위에 보리를 넉넉하게 덮어 숙성시킨다.
2. 3년 숙성시킨 보리굴비. 굴비 기름이 배어 보리색이 거무스름하게 변하고 굴비는 잘 말라 자연스럽게 구부러진다.
3. 돌처럼 굳은 보리굴비는 쌀뜨물에 담가 하룻밤 불린 다음 비늘을 긁어내고 아가미 쪽으로 내장을 써내 손질한다.
4. 보리굴비에 쌀뜨물을 붓고 참기름을 조금 보태 조리듯이 찐다. 칼칼한 맛을 살리려면 매운 고추를 썰어 올린다.
5. 결 따라 쪽쪽 찢어지는 굴비 살을 발라먹는 재미가 있는 보리굴비찜.
1. 수삼 껍질을 벗기고 구부려지게 말린 곡삼과 생강, 대추
2. 인삼차를 한 번 끓여서 따라내고 물을 다시 부어 재탕한다. 먹을 때는 대추쌈과 꿀을 곁들인다.
3. 가을에 나오는 탱자로 청을 만들어두었다가 곡삼차에 꿀 대신 넣어 마시면 감기 예방에 효과가 좋다.
4-5. 전국 팔도 토속음식을 찾아 기록하는 작업과 함께 내 부모님의 고향, 서울의 잊혀져가는 음식들을 찾아내고 기록하는 일도 계속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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