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은 예로부터 석지미자(石之美者)라고 불렸을 만큼 아름다운 돌로 취급됐다. 특히 서양에 다이아몬드가 있다면 동양에는 옥이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동양권에서 귀한 대접을 받았다. 금지옥엽(金枝玉葉), 금과옥조(金科玉條), ‘옥쟁반에 은구슬’, ‘금이야 옥이야’ 등과 같이 옥은 성어나 속담, 혹은 관용적인 표현에서도 옥은 좋은 의미로만 쓰여 왔다. 다듬기 전까지는 그저 빛깔 고운 돌에 불과해 보이지만 자르고 갈고 쓸고 쪼는 과정을 통해 옥은 빛을 머금은 보석으로 거듭 태어난다. 엄익평 옥장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거쳤던 절차탁마(切磋琢磨)의 과정은 어떠했을까.
옥은 삼국시대에는 왕이나 성골만이 가질 수 있는 전용물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옥을 다루는 장인을 일컬어 옥인(玉人)이라고 부른 기록이 남아있고, 조선시대에는 임금의 의복과 궁내의 일용품, 보물 따위의 관리를 맡아보던 관아인 상의원에 열 명의 옥 장인이 배속될 정도였다. 옥은 크게 경옥과 연옥으로 나뉘는데, 백옥으로 대표되는 연옥은 비취로 대표되는 경옥보다 굳기가 무르고 색상은 비슷하지만 화학적으로는 판이하게 다르다. 이처럼 옥의 특성이나 다루는 방법 또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옥장의 섬세한 손길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오로지 옥을 빛내기 위해 한길 인생을 걸어온 엄익평 옥장의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것도 바로 그 이유이다.
처음 발을 내딛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제가 옥을 처음 만난 게 열여섯 살 때였습니다. 칠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나 지긋지긋한 가난을 겪던 끝에 중학교 2학년에 스스로 학업을 중단했죠. 둘째 형의 소개로 상도동 터널 근방에 있던 당시 스승님이신 홍종호 씨의 옥공방에서 본격적으로 옥공예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1970년대에 지금의 춘천시에 속하는 강원도 춘성군 동면에서 양질의 옥인 춘천옥이 발굴되기 시작했는데요. 전승이 끊기다시피 했던 옥공예가 그때 다시 꽃을 피웠죠. 수습기간 동안 옥 원석을 자르고 옥판에 밑그림을 그리고 투각하는 절탁 기술의 초보과정만 배웠는데, 어느 날 스승님이 사돈에게 옥공방을 넘겨 버렸습니다. 옥공방의 새로운 주인은 장인이라기보다는 옥을 잘라본 적도 없는 경영주였습니다. 기술 향상도 없이 단순노동으로 이어지는 상황을 견디기가 힘들었어요. 당장 가게를 그만두고 집 근처 버려진 원두막에 중고기계를 설치해서 옥공장을 차렸죠.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옥공장을 차린 그때 제 나이가 고작 열아홉이었습니다. 남들은 제 초라한 행색에 웃었지만, 저에게는 인생이 걸린 전부였죠. 처음으로 도전했던 것은 백옥향로를 만드는 일이었어요. 스승님은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말렸지만, 제게는 단순히 완성보다도 이 길을 계속 갈 수 있을까를 가늠하는 시험의 의미가 더욱 컸습니다. 처음부터 난관이 있었죠. 공구가 없었어요. 완만하게 굽어있는 향로 내부를 다듬는 기구가 그 당시는 흔하지 않았거든요. 저는 청계천 일대를 뒤져가면서 당시 2만4천 원짜리 금속 톱을 부숴서 공구를 만들었죠. 당시 제 첫 월급이 4천 원 가량인 시기였으니 무모한 일로 보였을 거예요. 하지만 복잡한 시도 끝에 결국 백옥향로의 내부를 갈아내는 탁마공구를 스스로 만들어냈습니다. 공구 자체가 아니라 스스로 구상해서 해결책을 찾은 그 과정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더라고요. 백옥향로 제작에 성공한 이후로 일감이 몰려들기 시작해서 저와 기능공을 포함한 직원이 모두 일곱 명에 다다를 정도였어요. 그래서 저는 아직도 당시 만들었던 공구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서울시 무형문화재 옥장으로 지정되셨는데요.
그렇게 좋은 결과들을 얻기까지 힘든 일들이 많았죠. 옥공방을 잠시 닫고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는 기능공들이 모두 떠난 후였지만 홀로 옥을 다루는 일에 매진했습니다. 1995년에는 화재로 작업실 겸 공방이 모두 전소되는 시련도 있었어요. 가까스로 복구하고 일을 시작했지만 회복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어요. 그래도 옥에 대한 신념과 집착을 버리지 않은 덕분에 여러 경진대회와 공모전에서 입상하고 실력도 인정받을 수 있었죠. 전승공예대전에는 1990년부터 출품하여 1992년에는 문화부장관상을, 1996년에는 특별상인 문화재위원장상을 그리고 1998년도에는 국무총리상까지 수상했습니다. 옥 상감기법으로 받은 특허 제0322117호는 끈질긴 노력 끝에 얻은 결과였어요. 이후 노동부에서 산업포장의 증서를 받았고, 2006년에는 서울시 무형문화제 제 37호 옥장으로 지정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옥에 대해 더욱 알리고 싶은 가치가 있다면?
요즘 가장 큰 걱정은 갈수록 옥에 대한 인식이 낮아지는 것이에요. 선사시대부터 옥은 장식품이자 권위를 상징하는 장신구로 사용되었고, 중국 고전 예기(禮記)에서는 ‘군자는 반드시 옥을 지녀야 한다’는 뜻의 군자필패옥(君子必佩玉)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언제나 고급스러운 장신구이자 보석으로 대접받았던 옥이 지금은 예전만큼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거든요. 서양 보석의 유입과도 연관이 있지만, 가장 큰 원인은 사람들의 인식이 변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옥을 몸에 지니면 잡귀가 들어오지 않는다, 이런 믿음은 옛날부터 있었죠. 그런데 최근에는 일부 상인들이 마치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옥의 효능을 왜곡하고 과장하고 있어요. 이런 상술이 오히려 옥의 이미지를 낮추고 가치를 떨어뜨렸습니다. 사람들이 옥 제품을 기능성으로만 생각하다보니 공들여 만든 작품이 평가절하 되는 것 같아서 속상하기도 합니다.
준비하고 계신 활동과 교육 내용이 궁금합니다.
옥을 다루고 연구하며 일평생을 살아온 만큼, 여러 체험 활동을 통해 사람들이 옥을 접할 수 있는 문을 열어둘 계획입니다. 사극 협찬을 통해 옥에 담긴 의미를 새롭게 알리는 계기가 마련되기도 했었어요. 실제로 MBC 드라마 <동이>가 일본에서 방영된 후에 극에 등장했던 쌍가락지를 구매하기 위해 많은 관광객들이 제가 북촌에서 운영하는 가원공방으로 몰려들기도 했거든요. 앞으로도 옥공예 기술과 옥에 대한 연구뿐만 아니라, 옥의 가치를 제대로 알리기 위해 더 고민하고 노력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