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치 때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의 숙수는 조선시대 궁궐이나 민가의 잔칫날 음식을 준비하던 전문직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임금님 전속으로 수라상에 올라갈 음식을 만들던 사람을 가리켜 대령숙수라 칭했다. 궁중에 드나들며 임금님의 수라를 만들었던 조선시대 요리사, 대령숙수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본다.
임금의 명을 기다리는 전속 요리사
대령숙수라는 직업은 지금으로 말하면 미슐랭 셰프와 비견되어도 좋을 조선시대 최고의 요리사다. 10여 년 전 큰 인기를 모았던 <식객>은 허영만 화백의 동명 만화를 각색한 작품으로 대령숙수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벌어지는 요리 대결이라는, 전에 없던 흥미로운 소재가 흥행의 비결이다.
숙수(熟手)의 사전적 의미는 ‘잔치 때 음식을 만드는 사람’을 뜻한다. 조선시대 민가의 잔칫상을 준비하거나 궁궐의 외소주방에서 음식을 만들었던 남자 요리사를 숙수(熟手)라고 불렀다. 그중에서도 임금님을 비롯한 왕실 사람들이 먹는 음식을 준비하는 요리사는 임금의 명을 기다린다는 뜻을 담아 특별히 ‘대령숙수(待令熟手)’라 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궁궐에서 근무하는 상당수의 공무원들처럼 대령숙수는 출퇴근을 하였으며 결혼을 하여 궁궐 밖에서 가족과 살았다고 한다. 또한 아들이 열 살이 됐을 무렵 데리고 다니며 일을 돕도록 했으며, 요리하는 법을 가르쳐 숙수의 자리를 물려받게 만들었다. 임금의 수라상은 평소에는 소주방에서 만들어졌으나 진연이나 진찬 같은 규모가 큰 잔치에서는 임시로 지은 주방인 가가(假家)에서 음식을 준비했다.
조선판 출장 뷔페 서비스 셰프
예나 지금이나 음식을 만드는 것은 매우 고된 직업이어서 일이라기보다 육체노동에 가까웠다. 때문에 지금과 마찬가지로 식재료를 준비하고 그것을 조리하는 일은 남자들이 도맡아 하는 일로 여겨져 왔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수라간의 성비는 15(남):1(여)로 기록되어 있는데 실제로 세종임금 때 수라간에 출입하던 노비 388명 중 370명 이상이 남자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세종 15년(1453년)에는 명나라에서 요리를 할 줄 아는 여성을 보내라는 요구에 급히 여성들을 선발해 요리를 가르쳐 보내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조선시대 궁궐에서 열렸던 연회 즉, 잔치 풍경을 화폭에 담은 <선묘조제재경수연도>에서 숙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선묘조제재경수연도>는 70세가 넘는 늙으신 어머니를 모시고 열었던 잔치인 경수연(慶壽宴)을 다섯 개의 장면으로 묘사한 그림 안에는 담장 밖의 임시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는 숙수들의 다양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출장 뷔페 서비스를 하는 전문직이었던 셈이다. 당시에는 잔치를 위해 임시로 만든 주방인 조찬소(造饌所)가 있었는데, 그림 속의 숙수들은 바로 이 공간에서 음식을 조리하고 불을 지피는 등 잔치 준비에 여념이 없는 모습이다.
궁궐에서 음식을 만드는 일을 하는 만큼 숙수에게는 큰 책임이 따르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인 고종의 수라에 문제가 생겨 대령숙수가 처벌을 받은 일화가 등장한다. 고종의 재위 40년째가 되던 해인 1903년, 수라상에 올린 생홍합에 섞인 모래 때문에 왕의 치아가 상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당시 숙수였던 김원근을 비롯해 관련된 여러 사람들을 태형이나 징역에 처할 것을 건의하였는데 고종황제는 이들을 태형에 처하는 대신 유배 보내거나 징역을 면해주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궁중요리 레스토랑
임진왜란 이후인 조선후기부터는 궁궐 안 남자 요리사들의 업무가 세분화되기 시작했다. 대령숙수를 비롯해 떡과 한과를 담당하는 조과숙수, 소주방에 근무하는 주방숙수 외에 국수를 만드는 세면장, 만두를 빚는 상화병장은 물론 죽을 만드는 죽장도 이 무렵 생겨난다.
근대로 접어들기 시작한 일제강점기에는 숙수들이 대거 실직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대한제국이 강제로 일본에 의해 병합되면서 궁궐의 규모가 대폭 축소되고 이로 인해 숙수들 역시 일자리를 잃는 경우가 속출했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음식점이 문을 열었고 이는 숙수들이 다시 취업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대한제국에서 황제의 음식을 담당하는 기관인 궁내부의 전선사 장선과 주선과장을 지냈던 안순환이 숙수들을 고용해 조선요리옥 명월관을 창업했기 때문이다.
1900년대 초 광화문 사거리에 개점한 명월관은 최초의 근대적 식당이자 보통 사람들이 처음으로 왕의 음식을 맛볼 수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조선왕실의 궁중음식 대중화에 앞장섰던 조선의 셰프 숙수의 명맥을 이제는 드라마나 영화에서만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못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