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이야기

다방 <제비> 속의 천재시인 이상을 만나는 여행
등록일 2020-12-14 조회수3252
다방 <제비> 속의 천재시인 이상을 만나는 여행

다방 <제비> 속의 천재시인 이상을 만나는 여행

시인 이상은 1910년생이다. 아주 오래전에 태어난 사람인데 그렇게 옛날 사람이란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의 작품들이 파격적이고 모던해서 일수도 있고 딱 27년을 살고 간 그의 인생이 비현실적이어서 일수도 있다. 이상이 살았던 1930년대 당시 경성의 인구는 39만4,240명이었다. 신문물이 쏟아져 들어왔고 카페, 모던뽀이, 백화점, 극장이 번성했다. 도시의 밤을 유혹하는 새로운 문화들은 나라를 잃은 식민지 수도로서의 설움과 맞물려 애잔한 정서를 만들어내고 있었으리라. 이상이 개업한 다방 <제비>를 비롯해 시인, 연극, 영화 문화인들이 입담을 피웠던 카페들과 경성의 명물로 자리잡은 미쓰코시 백화점, 극장 등을 모던뽀이가 된 심정으로 걸어보는 여행을 떠나보자

이상은 누구인가

(좌)이상 (우)이상의 소설 날개 (좌)이상 (우)이상의 소설 날개

이상은 1931년 처녀작으로 <이상한 가역반응="가역반응"> <파편의 경치="경치">를 <조선과건축>지에 발표하고 1932년 동지에 시 <건축무한 육면각체="육면각체">를 처음으로 '이상'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했다. 1934년 시 오감도를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하였으나 난해하다는 독자들의 빗발치는 항의로 중단했다. 1936년 <조광지에 <날개>를 발표하여 큰 화재를 일으켰고 같은 해에 <동해> <봉별기>등을 발표했다. 주요 작품으로 전기 외에 소설 지주회시, 환시기, 실화 등이 있고 시에는 이런시, 거울, 지비, 정식, 명경, 수필에는 산촌여정, 조춘점묘, 권태등이 있다. 1957년 80여 편의 전 작품을 수록한 ,이상전집 3권이 간행되었다. 그의 천재적 문학성은 31~32년 사이의 무려 2000여점이라는 경의적인 숫자의 시작을 토해냈다. 하지만 무질서한 독서와 밤샘은 결국 그를 폐결핵으로 몰고 갔다. 식민지 예술가들의 모임 터였던 다방을 출입하게 된 것도 이즈음부터였다. 종로2가의 멕시코 낙랑 등을 드나들면서 꼽추화가로 유명한 구본응을 비롯, 이태준, 박태원, 이무영, 조지훈, 이서구 등의 문인들과 사귀게 되었다. 다방과 술집을 순회하며 문학과 미술을 논하고 인생과 세상을 향해 냉소와 독설을 내뿜었다.

통인동에 만든 이상의 집, 등록문화재 말소과정

이상은 2살 때부터 부모와 떨어져 살아야 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운데다 큰 아버지에게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 통인동 154번지의 큰아버지댁에서 옮겨 살았던 것이다. 이상이 23살 때까지 살았던 통인동 본가는 그가 <종생기>에서 <10대조의 고성>이라고 한 것처럼 꽤나 큰 한옥이었던 모양이다. 본채에 행랑채와 사랑채까지 딸린 300여 평의 넓은 집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집의 옛 모습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이상이 21년간 살았던 통인동 154번지, 이 집은 현재 10여개의 필지로 분할돼 여러 채의 한옥들이 들어서 있고 길가 쪽으로는 인쇄소, 책대여방, 열쇠가게 등이 영업 중이다. 이들 가게는 물론이고 골목 안 복덕방에서도 이 일대가 일세를 풍미했던 천재시인 이상의 옛 집 터였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서울 통인동 154-10번지에 있는 이상의 옛집이 등록문화재 말소 과정을 밟고 있다고 보도했다. 2004년 창작 산실을 보존한다는 명분으로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던 이 집이 이상이 3살부터 24살까지 살던 백부의 집이 아니라, 이상이 떠난 뒤인 1933년 필지가 쪼개지면서 집장사들이 지은 집의 일부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문화재청은 가옥대장, 지번 등에 대한 충분한 조사연구와 검토가 없었다는 사과성 해명을 내 놓았다.

모던뽀이, 카페걸, 백화점과 극장의 등장

모던뽀이의유행을소개한신문기사 모던뽀이의유행을소개한신문기사

카페

시대조류에 따라 도시 향악중심인 <카페>와 <빠>는 참담한 형편인데 신경마비성에 빠지 근대인의 흥미를 집중시켜보려는 경영자의 고심이 구조나 장식에 과도한 유랑기분을 자아낼 뿐만 아니라 <서비스>가 지나쳐 풍기를 문란하고 혹은 안면을 방해하므로 경찰 당국의 예리한 문은 <카페>계에도 집중되어 명일부터 총독부에서 개최되는 도보안과장화의에서도 특히 이방면의 취체지시가 있을 모양이라고 한다.
동아일보 1933년 5월 23일 2면

1930년대 들어 카페문화가 대중적으로 확산되는데 <낙랑파라>는 그 중 하나다. 낙랑파라는 적자투성이의 다방경영을 본격적으로 수지를 맞추어 보인 것에 특징이 있다. 카페는 근대 자본주의의 태동과 깊은 관련을 갖는다. 카페는 호사스런 살롱과 허름한 술집 카바레 사이에서 탄생한 근대의 작은 광장이었다. 이상의 삶은 문화인으로서의 근대적 삶과 카페문화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1933년 <제비>개업을 전후하여 영화연극인 화가, 음악가, 문인들에 의하여 다방이 우후죽순처럼 생겼는데 이들은 각기 그의 특색을 내세우며 종로일대와 충무로, 명동, 소공동에 자리잡으며 경성은 카페문화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카페제비(서울역사박물관) 카페제비(서울역사박물관)

극장

극장은 식민지배와 함께 근대사회에서 그 역할이 새롭게 규정되었다. 조선 최초의 극장은 대한제국기 궁내부 소속의 협율사였다. 협율사에서는 기녀들의 가무를 비롯, 줄타기와 마술등이 공연되었고 외국영화도 상영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협율사의 운영이 저속하고 난잡하다는 비난으로 1906년 폐쇄되고, 1908년 이를 인수한 이인직이 원극사를 개설하여 신극운동의 막을 열었다. 대중의 위락거리로 신파극이 가세하기 시작했다. 서양의 연극을 모방하면서 출발한 새로운 극 양식인 신파극은 우리에게 익숙한 ‘이수일과 심순애’가 대표적인 예가 된다.

명동예술극장 명동예술극장

1935년 11월11일 새로운 극장이 문을 열었다. 동양극장이 연극전용을 표방하며 새로 문을 열었다. 동양극장은 홍순언 배구자 부부가 세운 조선 최초의 근대적 설비를 갖춘 연극 전문 극장이다.

백화점

개항 이후 조선의 경제계에 가장 큰 변화 중의 하나는 백화점이라는 새로운 유통시스템의 등장이었다. 1930년은 경성에 백화점이 등장하는 시기었다. 경성을 대표하는 백화점으로 삼월백화점, 종로백화점, 화신백화점, 정자옥백화점, 삼중정 백화점 등 백화점임을 내세우는 근대적인 상가들이 등장했다.

미쓰코시 백화점

조선에 진출한 일본 상업자본의 대표적인 미쓰이 재벌은 기존의 미쓰코시 오복점을 대신할 백화점을 세우기 위해 구 경성부청터를 구입하여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의 미쓰코시 백화점을 건축하였다. 각 층별 매장외에 전시공간을 갖추고 있었으며 옥상에는 옥상정원이 위치해서 카페로 사용되었다. 미쓰코시 백화점은 최초의 본격적인 백화점으로 정찰판매, 반품제도 등 근대적인 백화점의 영업체제를 갖춘 것으로 의의가 있다. 이상의 산문 <날개>의 배경이 되는 곳으로 현재 신세계백화점 본점으로 남아있는 곳이다.

명동미쓰코씨백화점 명동미쓰코씨백화점

관광과 호텔

1930년대 들어 전국 주요도시에는 관광협회가 결성되었으며 서을의 대표적 호텔러 철도국에서 운영하는 조선철도호텔과 민간자본에 의한 반도호텔, 외에도 중소규모의 호텔들이 있었다. 식민지 조선의 대도시에 건설된 호텔은 대부분 지역에서 조선총독부 철도국에서 직영하는 형태로 운영되었으며 이러한 관 주도의 호텔에 변화가 생긴 것도 1930년대 식민지 자본주의의 성장과 맥을 같이 한다.

구한말 조선호텔 황궁우계단(서울역사박물관) 구한말 조선호텔 황궁우계단(서울역사박물관)

참고도서

  • 한국콘텐츠진흥원 / 이상의 집 터
  • 한국콘텐츠진흥원 / 소비문화의 변화와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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