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별 표준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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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중종 32년(1537) 영의정 권철의 막내아들로 태아나 늦은 나이인 46세(1582년,선조 15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광주목사로 임명되었고 임진왜란(1592~1598)중 전주성을 점령하여 호남지방을 확보하려는 왜군을 1592년 음력 7월8일 충청남도 금산군과 전라북도 완주군 사이의 이치고개에서 물리쳤다, 이치대첩은

  고대 남북국시대 때 신라 말기의 격화된 사회적 모순을 극복하고 새로운 통합을 이루기 위한 목적으로 벌인 통일전쟁을 주도한 후고구려 건국 군주이다. 901년 지방 호족세력에 의하여 장군으로 추대된 뒤 후고구려(후에 마진(摩震), 태봉(泰封)으로 개정)를 건국하였다. 광평성(廣評省)을 비롯한 여러 관부를 두어 국가체제를 정비하였고, 한때 전국의 2/3 가량

 교명 안드레 (Andre), 1836년 (헌종 2) 프랑스 신부 모방(P. Maubant)에게서 영세(領洗)를 받고 예비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상경(上京)하였다. 역관(譯官) 유진길(劉進吉)에게 중국어를 배우고, 모방 신부의 소개장을 가지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조선전교(朝鮮傳敎)의 책임을 진 마카오의 파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 칼레리 신부로부터

 역대 왕조 중 가장 강성하고 대륙적 기상이 웅비했던 고구려의 왕으로서 ‘광개토대왕’이란 칭호는 땅을 널리 개척한 임금이란 뜻으로, 생존 시에는 영락대왕으로 불리었다. 어려서부터 영웅적 기상과 웅대한 포부를 가진 대왕은, 아버지 고국양왕이 죽자, 391년 18세의 나이로 왕에 즉위하였다. 즉위하자마자 곧바로 국력신장에 진력하고, 군사훈련 강화 및

 자는 백원(伯源), 호는 고산자(古山子), 본관은 청도(淸道). 황해도 출신, 어려서 서울로 이주, 미천한 가문의 출신이었으나 학문을 열심히 닦았으며, 정밀한 지도의 작성에 뜻을 품었다. 그는 지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지(地志)가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지지란 역대 제도와 문물, 풍습 등과 지역과의 관계를 적은 것을 말한다. 그래서 역사에

 중원소경(中原小京 : 지금의 충청북도 충주)의 사량(沙梁) 출신. 육두품(六頭品)으로 보이는 내마(奈麻) 석체(昔諦)의 아들이다. 어머니가 그를 임신했을 때 꿈에서 머리에 뿔이 돋친 사람을 보았는데 그가 태어나자 머리 뒤에 높은 뼈가 있었다. 이를 이상히 여긴 아버지가 그를 데리고 현자(賢者)에게 가 물어보니 뛰어난 인물이 될 것이라고 말해 주었

 호는 단원(檀園) 본관은 김해(金海),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그림솜씨가 뛰어났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제대로 그림공부를 하지 못했다. 호조참판(戶曺參判) 강세황(姜世晃) 앞에서 그림을 그려, 그 실력을 인정받아 그의 천거로 도화서 화원(圖畵署畵員)이 되었다.  1771년(영조 47) 왕세손(뒷날 정조)의 얼굴을 그렸고

 초명은 온천(殷川), 본관은 금천(衿川), 서울출생, 고려개국공신인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궁진(弓珍)의 아들, 아버지로부터 학문과 무예를 배우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김장길의 양아들이 됨. 983년(성종 2) 문과(文科)에 장원, 예부시랑(禮部侍郎)이 되었다.  1010년(현종 1) 거란 성종(聖宗)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본관 김해(金海). 가야국의 시조 김수로왕(金首露王)의 12대손(代孫)으로, 화랑이 되어 화랑정신을 기르고, 611년 삼국통일을 기원(祈願)하고 무술을 닦은 뒤 국선(國仙)이 되었다. 644년 상장군(上將軍)이 되어,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등 7개의 성을 쳐 이기고 이듬해 1월에 개선하였다.  그런데 왕을 알현하기도 전에 매리

 자는 원춘(元春), 호는 추사(秋史), 본관은 경주(慶州), 판서 노경(魯敬)의 아들로 백부 노영(魯永)에게 입양(入養)되었다. 1809년(순조 9) 생원(生員)이 되고, 1819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설서(說書), 검열(檢閱)을 거쳐 1823년 규장각 대교(奎章閣待敎)가 되었다. 충청우도 암행어사(忠淸右道暗行御史), 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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