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별 표준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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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략(智略)과 무용(武勇)에 뛰어난 장군으로서 국, 내외에 두루 명성을 떨쳤다.  중국의 수나라는 612년(영양왕 23) 신라와 백제를 압도하고 만주와 연해주 유역에까지 뻗어있던 고구려를 탐내어 중국을 통일한 여세를 몰아 수 양제(楊帝)가 직접 출군하여 우중문(宇仲文), 우문술(宇文述) 및 113만 여의 대군을 이끌고 수륙 양군

 무녕왕의 아들이며, 이름은 명농이다. 《양서 梁書》 백제전에는 이름을 명(明)이라 하였고, 《일본서기》에는 명왕(明王) 또는 성명왕(聖明王)으로 표기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는 “지식이 영매(英邁)하고 결단력이 있어 나라사람이 성왕으로 칭하였다.”라 하였고 《일본서기》에는 “천도지리에 통달하여 그 이름이 사방에 퍼졌다.”라고 찬양하고 있어서 그의

 호는 율곡(栗谷). 본관 덕수(德水). 어머니는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 강릉(江陵) 출신이다. 어려서 어머니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16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경을 연구하다가 다시 유학(儒學)에 전심하고 23세 때 이 황(李 滉)을 찾아가 만났다.  1564년(명종 19) 생원시(生員試), 식년문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가구(可久), 좌찬성에 추증된 화년(和年)의 아들이다. 1451년(문종 1) 생원시에 합격하고, 1454년(단종 2)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집현전 부수찬이 되고, 1455년(세조 1) 12월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이듬해 6월 경연사경(經筵司經)으로 있으면서 단종 복위사건에 연루된 협의를 받았으나

 자는 원춘(元春), 호는 추사(秋史), 본관은 경주(慶州), 판서 노경(魯敬)의 아들로 백부 노영(魯永)에게 입양(入養)되었다. 1809년(순조 9) 생원(生員)이 되고, 1819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설서(說書), 검열(檢閱)을 거쳐 1823년 규장각 대교(奎章閣待敎)가 되었다. 충청우도 암행어사(忠淸右道暗行御史), 검

 대가야국의 시조인 뇌질주일(惱窒朱日)[이진아시왕의 별칭])과 금관가야국의 시조인 뇌질청예(惱窒靑裔)[수로왕(首露王)의 별칭]의 어머니로 전해 온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9세기 초에 해인사를 창건한 두 스님의 전기인 최치원의 <석이정전(釋利貞傳)>과 <석순응전(釋順應傳)>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즉 ≪석이정전≫을

 본관은 이천(利川). 자는 염윤(廉允), 시호는 장위(章威). 재상을 지낸 필(弼)의 아들로 19세 때인 960년(광종 11) 문과에 갑과로 급제, 내의시랑(內議侍郞)이 되었다. 972년(광종 23) 송나라에 가서 중단되었던 국교를 회복하고 송의 태조로부터 검교병부상서(檢校兵部尙書)라는 명예직을 받았다. 983년(성종 2) 병관어사(兵官御事, 국

 교산(蛟山) 허균(許筠) (1569~1618) 허균(許筠,1569~1618)의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 성옹(惺翁) 등이다. 허엽의 막내아들로 강릉시 사천에서 태어나 초당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 노수신 등 재상과 장차 이름을 날리게 될 이순신, 유성룡, 원균이 살고 있는 건천동에서 살다가 1577

 본관은 양천, 본명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 호는 난설헌(蘭雪軒)으로 강릉출신이었다. 엽(曄)의 딸이고 봉의 동생이며 균(筠)의 누이이다. 가문은 현상(賢相) 공(珙)의 혈통을 이은 명문으로 여러 대의 문한가(文輪家)로 유명한 학자와 인물을 배출하였다. 이러한 천재적 가문에서 성장하면서 어릴 때 오빠와 동생의 틈바구니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배웠

 이름은 장(璋) 또는 무강(武康), 헌병(獻丙), 일기사덕(一耆篩德)이라고도 하였다. 제29대 법왕의 아들이며, 제31대 의자왕의 아버지이다. 무왕 직전의 혜왕과 법왕은 모두 재위 2년 만에 죽었다. 그 무렵 백제는 내외의 정세가 악화되고 귀족간의 내분이나 왕실권위의 약화에 직면하고 있었는데, 거듭되는 왕의 단명은 그러한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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