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야별 표준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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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관 순천, 자 인수, 호 취금헌(醉琴軒), 시호 충정(忠正), 형조판서 중림(中林)의 아들이다.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 성삼문(成三問)과 함께 집현전(集賢殿) 학사로서 여러 가지 편찬사업에 종사하여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1438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1447년

 일명 태종(苔宗). 성은 김씨. 내물왕의 4대손으로, 지증왕 이래 법흥왕·진흥왕대까지 활약한 신라의 대표적인 장군이자 정치가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열전에 따르면, 이사부는 505년(지증왕 6) 신라 최초로 설치된 실직주(悉直州 : 지금의 삼척)의 군주(軍主)에 임명되었고, 512년(지증왕 13)에는 하슬

 제주출신 여성. 조선후기 거상(巨商)으로 제주도에 큰 기근(飢饉)이 발생하자 자신의 전 재산을 내놓아 육지에서 사온 진휼미로 빈사상태의 제주도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시대를 뛰어 넘은 최고경영자(CEO)로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몸소 실천한 인물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1739년(영조 15)

 본관은 평양(平壤), 자는 집중(執中), 시호는 무의(武毅)이다. 집안은 증조인 유(猷)가 황해 병마절도사를 지냈고, 부친인 경(儆)이 무신년(戊申年) 난 때 공로를 세워 삼도통제사까지 지낸 무반 벌열가문이다.  1768년(영조 44)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지방관직을 거쳤고 정조 연간에 홍충도 병마절도사, 훈련대장, 어영대장, 장용

 논개의 생애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광해군 13년(1621년)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 “논개는 진주의 관기(官妓)였으며 계사년에 왜적에게 진주성이 함락되자 논개는 촉석루 아래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강물에 뛰어들어 순국했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인조 3년(1625년) 이후 진주의 선비 정대륭

 고불 맹사성은 조선 초의 문신이자 청백리로 명성이 높은 대표적인 역사 인물 중 한분이다. 본관은 신창(新昌)이고 신창 맹씨 중시조인 이부전서 의(儀)의 증손자이고 이부상서를 지낸 두문동 72현 유(裕)의 손자이다. 아버님은 고려 말에 수문전제학을 지낸 신창 맹씨 온양 입향조 동포공 희도(希道)이고 어머니는 흥양(興陽) 조(趙)씨이다. 고려 말의

 이름은 장(璋) 또는 무강(武康), 헌병(獻丙), 일기사덕(一耆篩德)이라고도 하였다. 제29대 법왕의 아들이며, 제31대 의자왕의 아버지이다. 무왕 직전의 혜왕과 법왕은 모두 재위 2년 만에 죽었다. 그 무렵 백제는 내외의 정세가 악화되고 귀족간의 내분이나 왕실권위의 약화에 직면하고 있었는데, 거듭되는 왕의 단명은 그러한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을

《삼국유사》에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로 절세의 미인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미모의 공주라는 소문을 들은 백제의 서동은  신라의 수도로 몰래 와서 아이들에게 마〔薯〕를 나누어주어 환심을 사는 한편, 선화공주가 자신과 더불어 은밀히 접촉하고 있다는 내용의 모략적인 동요를 지어서 아이들에게 부르게 한 결과 선화공주는 부왕의 노여움을 사서 왕궁에서

 1565년 서울에서 태어난 정문부 의병장은 11살 때부터 논어를 읽고 사서삼경에 통달했으며 천문(天文) 산수(算數)뿐 아니라 활쏘기까지 문무를 겸비한 선비로 성장했다. 21세 되던 해에 생원과 진사시험에 모두 합격했고 23세 때 성균관에서 학문을 닦았으며 24세 되던 해인 1588년 문과에 급제, 이듬해 승정원 주서, 부정자, 정자(정7품), 홍

 그는 천문학에 조예가 깊은 학자 관료로서 고려 말기에 천문(天文)과 기상(氣象)을 관장하는 서운관(書雲觀)의 장관직인 판사(判事)를 지냈다.  조선이 개국하자 절의를 지켜 개성(松都)으로부터 고향인 충남 서산(瑞山)으로 돌아왔으나, 새 왕조의 표상(表象)이 되는 새로운 천문도를 제작코자 거듭 요청하는 태조(太祖)의 명을 거절하지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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