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별 문화인물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
1467∼1555 / 조선 중기의 문신
  • 문화관광부는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강호문학의 선구자인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 : 1467∼1555) 선생을 7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하였다.
생애 및 업적
  •  농암(聾巖) 이현보는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벼슬에서 물러난 뒤 고향으로 돌아가서 「농암가(聾巖歌)」,「어부가(漁父歌)」같은 국문시가를 창작하거나 개작하여 영남가단을 창시한 인물이다. 그는 연산군 때 과거에 급제하여 연산군 - 중종 - 인종 - 명종 등 4대를 섬기면서 무려 44년(32세에서 76세까지) 간이나 벼슬아치로 봉직하였다. 이 기간 동안 주로 외직을 자청하여 아홉 고을의 수령과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는데 치적이 우수하여 여러 차례 포상을 받았으며, 청렴결백하여 청백리로 선발되기도 하였다.


     그는 외직을 역임하는 동안 향토에 기반을 둔 사대부 계층의 향촌 자치기능 강화에 역점을 두고 고을을 다스렸는데, 벼슬에서 은퇴한 뒤에는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가는 처사적(處士的) 삶의 방식을 개발해 내는데 몰두하여, 후배인 이황이나 이황의 제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강호생활(江湖生活)의 풍류(風流)를 즐기는데는 읊기만 하는 한시 보다도 노래로 부를 수 있는 국문시가가 더 유용하다는 사실을 체득하고, 스스로 「효빈가(效嚬歌)」,「농암가」,「생일가」같은 단가(당시는 아직 시조창이 나오기 이전이므로 시조라는 명칭이 없었음)를 짓기도 하였다. 또한 83세 때 잊혀 가던 「어부가」(12장)를 재발견하여 이를 개작하였는데, 이현보에 의하여 개작된 「어부가」(9장)는 흔히 농암 「어부가」로 불리며 조선후기의 한국문화(문학과 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남겼다. 원래 중국의 악부시(노래로 부를 수 있는 시)인 사(詞)에서 유래한 기존의 「어부가」(12장)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사(詞)와 함께 사라져 가고 있었는데 이현보는 이를 재발견하고 다듬어 놓음으로써 「어부가」가 우리나라 노래인 장가(당시에는 가사를 장가, 시조를 단가라고 불렀다)로 재창조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이 농암 「어부가」는 뒷날 궁중의 무용극인 정재(呈才)에서부터 민간의 뱃노래에 이르기까지 폭 넓게 불렸고 조선말엽에는 십이가사(십이잡가라고도 함)의 하나인 「어부가(일명 어부사)」로 정착되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가요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현보는 또 기존의 어부단가 10장을 5장으로 개작하기도 하였는데 이렇게 이현보에 의하여 다듬어 진 「어부가」(「어부단가」와 구별하기 위하여 「어부장가」라고 부르기도 함)와 「어부단가」는 윤선도의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이중경(李重慶)의 「오대어부가(梧臺漁父歌)」, 이형상(李衡祥)의「창부사( 父詞)」, 이한진(李漢鎭)의 「속어부사(續漁父詞)」, 신재효(申在孝)의「어부사」같은 작품의 창작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쳐서 조선 후기 문학사에서 「어부가」라는 하나의 작품 계열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현보의 국문시가 작품들이 영남의 후배들에게 국문시가의 필요성을 일깨워 줌으로써 이황에 의하여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창작으로 계승되고, 다시 이황의 제자인 권호문(權好文)의 「독락팔곡(獨樂八曲)」과 「한거십팔곡(閑居十八曲)」, 이숙량(李淑樑)의 「분천강호가(汾川江湖歌)」의 창작으로 이어져 내려가면서 국문학사에서 영남가단이라고 불리는 국문시가 창작의 전통으로 확립되어, 송순 - 정철 - 윤선도로 이어지는 호남가단과 함께 조선후기 한국문학을 풍성하게 하는 기폭제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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