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야별 문화상징

풍물굿
선정취지 및 필요성
  • 풍물은 타악기인 꽹과리, 징, 장구, 북, 소고와 관악기인 날라리(호적)와 나발을 총칭한다. 풍물굿은 이들 풍물을 연주하는 행위를 말한다. 풍물굿은 신앙, 노동, 군사, 연예 같은 요소들이 두루 합쳐져서 대하 같은 강물을 만들면서 풍물굿을 완성시켰다. 상쇠덕담의 종교성, 힘차고 도발적이기까지 한 진풀이의 전투성, 마구잡이 춤과 노래의 총체적 예술성, 이 모든 것을 아우르면서 가장 힘든 논일의 현장에서 완성되었으니, 풍물굿의 폭과 깊이가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다.그러나 우리 것을 무시하는 풍토 속에서 풍물굿은 업신여김을 당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1970~80년대 들어 젊은 층을 중심으로 풍물굿이 다시 살아났다. 되살아난 풍물굿은 바로 한국현대사의 복원과도 같다.21세기의 풍물굿 준비, 전통시대의 문화유산을 다음 세대에게 창조적으로 넘겨주는 일이야말로 우리시대의 몫이다.
역사적 배경 및 상징물의 의미
  • 고대 청동기시대에 사슴가죽으로 만든 북, 삼국시대에 절에서 만든 징, 고려시대에 청자로 빚은 장구 등 이들 악기로만 따지면 풍물굿의 기원은 선사고대시대로 올라간다. 그러나 오늘날 볼 수 있는 풍물굿의 원형을 짐작케 해주는 문헌기록은 아무래도 후대로 내려온다. 임진왜란이 막 끝난 16세기 초반에 쓰여 진 성현의 〈용재총화〉에는 섣달 그믐날 관상감에서 어린아이 수십 명을 궁중에 들여보내 북과 피를 갖추고 악귀 방상시를 쫓아내던 풍습이 나온다. 이 때 북과 방울을 울려 방매귀라 불렀다고 한다. 방매귀는 악귀를 쫓는 의례로 오늘날 풍물굿의 하나인 매귀굿의 선조 격이다. 1세기 뒤인 1648년에 김옥이 쓴 〈송도지〉란 책에는 섣달 그믐날 북치고 복 빌어주며 쌀을 걸립하는 대목이 나온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쌀과 돈을 걷는 걸립굿과 유사하다. 그로부터 1백50여년 뒤인 1799년에 이옥이 일기체 형식으로 쓴 〈봉성문여〉에는 매귀희가 나온다. 문헌자료는 풍물굿이 악귀를 쫓고 복을 구하던 신앙풍습에서 나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모내기노래를 부르면서 논북을 치던 모방고, 김매기의 두레풍장굿은 가닥이 다르다. 조선후기에 와서야 모내기가 확산되었고, 두레가 강해지면서 풍물굿이 체계화 했다. 풍물굿은 16세기로부터 18세기에 이르는 조선후기에 내용적으로 완성되었다. 매귀굿에서 기원하였으되, 그 완성의 현장은 노동의 힘겨움을 놀이로 풀어내던 농민들의 일터였던 셈이다. 과연 풍물굿은 이쯤에서 완성되었을까? 풍물패의 상징인 농기, 명령을 전하는 영기는 바로 조선시대 군사깃발과 밀접하다. 덕수궁소장유물을 보면, 용기, 영기가 등장하며 형태도 농기와 똑같다. 당대 농민은 예비군들로서 유사시에 전투원으로 바뀌었다. 병농일치제 아래서 조선시대 농민들은 농기 등 군사훈련 요소가 가미된 풍물굿을 통해 무리지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방법을 익혀 실제전투에 활용 했다. 마을 풍물굿에는 또 다른 요소도 흘러들어왔다. 장터를 누비면서 연예를 팔면서 살아가던 유랑예인집단의 세련된 기예가 풍물굿의 수준을 한껏 끌어올렸다.
다른 나라의 유사 사례
  • 공동노동을 하면서 노동의 애환을 달래주는 음악과 춤은 어느 나라에나 존재한다. 그러나 풍물굿은 두레라는 강력한 조직에 힘입어 대단히 체계적으로 발달하였으며 세계연희사에서 유래가 드물다. 풍물굿은 가히 한국음악의 상징과도 같이 알려져 있다.
기대효과
  • 풍물굿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의 문화상징지정은 이 같은 세계화에 보다 뒷받침이 되어줄 것이다.
문화사업 및 비영리 분야에서의 활용방안
  • 풍물굿은 연주 자체뿐 아니라 음반, CD, DVD 등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에 알려지고 있다. 풍물굿은 학교, 사회, 아파트, 노조, 직장 등 공간을 뛰어넘어 활용되고 있는 한국이 빚어낸 최고의 농민예술로 쓰여 지고 있다.
참고자료
  • 주강현,『한국의 두레1·2』,집문당, 1997-8 주강현, 『우리문화의 수수께끼』,한겨레신문사,1996 <주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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