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화
조선 후기 왕실 남자의 흑단령은 대군과 왕자, 부마의 흑단령을 말한다. 품계에 따라 흉배를 부착하고 품대를 띈 의례복으로 상복(常服)이라 칭하였다. 문사각의 사모와 운보문단 또는 운보문사의 흑단령, 품대, 흑화로 구성되었는데 당상관 이상은 무늬 있는 단(緞)이나 무늬 있는 사(紗) 직물을 사용했고 당하관인 경우에는 무문단이나 무문사를 사용하였다. 품계에 따라 서대 이하 삽금대, 소금대, 삽은대 등을 띠었다.
영조(英祖 재위, 1724~1776)가 왕위에 오르기 전 왕자로 있었던 1714년 연잉군(延礽君) 시절의 초상화에서 왕실 남자의 흑단령을 볼 수 있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품으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연잉군의 사모는 당상관의 어른무늬가 있는 문사각의 사모이다. 사모의 좌측에는 궁중잔치 때 꽃을 꽂을 수 있도록 구리철사로 만든 화공(花孔) 2개가 있다. 초상화에 보이는 흑단령은 겉감은 유록색(柳綠色)의 구름과 보배무늬가 있는 단직물[雲寶紋緞]을 사용했고, 안감 더그레는 남색 구름과 보배무늬의 옷감을 사용하였다. 깃은 둥근 깃으로 목 부분까지 높이 올라온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깃의 여밈은 매듭단추로 잠글 수 있게 하였다. 흑단령의 길은 옷고름으로 여몄을 것이나 길고 넓은 소매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이 당시의 단령은 경기도박물관 소장 의원군(義原君) 이혁(李爀, 1664~1722) 묘에서 출토된 유물이 있다. 이혁 묘 출토단령은 겉옷(단령)과 속옷(더그레)을 각각 만들어 가장자리를 꿰매어 겹옷으로 만들었다. 단령의 무는 뒤로 돌려 고정하였다.
흑단령에는 품계에 따라 흉배를 부착하였는데 연잉군은 흑단령에 왕자용 금사 백택(白澤)흉배를 달았다. 허리띠는 푸른색 바탕에 1품의 허리띠인 서대(犀帶)를 하였다. 신은 검정색 가죽 장화인 흑피화(黑皮靴)이다. 신발부리가 들려진 것이 특징이며 바닥에 흰 분칠을 하였다.
19세기 후기 흥선대원군 이하응(興宣大院君 李昰應, 1820∼1898) 초상화 역시 흑단령을 착용한 모습인데 대군용 흉배인 기린흉배를 부착하고 허리에 1품용 서대를 둘렀다. 부마 역시 흑단령을 착용하였는데 사도세자의 사위인 흥은위 정재화(興恩尉 鄭在和, 1754∼1790)의 1780년대 초상화에는 무늬없는 당하관 흑단령에 단학흉배를 달고 펑색 띠에 삽은대를 띠었다. 순원왕후가 덕온공주의 남편 남녕위 윤의선(尹宜善, 1823∼1887)에게 내린 혼수품을 기록한 「혼수발기」에는 유록운문갑사 흑단령과 금사[金體] 쌍학흉배 기록을 볼 수 있다.
참고문헌
경기도박물관(2004), 『경기도박물관명품선』
이은주(2005), 「조선시대 백관의 시복과 상복 제도 변천」, 『服飾』 55(6), 한국복식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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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2008), 「조선시대 무관의 길짐승 흉배제도와 실제」, 『服飾』 58(5), 한국복식학회.
이은주(2019), 「남녕위(南寧尉) 윤의선(尹宜善)의 1837년 「혼수발기」 속 관복(冠服) 고찰」, 『文化財』 52(3), 국립문화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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