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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반죽동 석조( 公州班竹洞石槽 )자세히보기
공주 중동 석조(보물 제148호)와 같이 대통사터에 있었던 백제의 유물로, 절에서 주로 연꽃을 담아 장식하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공주 중동 석조와는 규모만 다를 뿐 양식이나 조각수법이 거의 같아서, 두 석조는 어느 한 건물 앞에 한 쌍으로 두려고 동시에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석조는 굽이 높은 사발을 확대한 모양으로 네모난 바닥돌 이외에는 거의 동그란 구조이다. 바닥돌 위에 원기둥으로 된 받침기둥을 세우고, 그 위로 둥글고 큰 석조를 얹었는데, 석조는 화강암의 안을 파내어 만든 것이다. 받침 기둥에는 전형적인 백제 수법으로 12개의 잎을 가진 연꽃무늬를 도드라지게 새겨 두었는데, 이 무늬는 공주지방에서 나온 기와무늬와도 같은 모양이다. 그 위로 놓여있는 석조는 입구 가장자리에 굽처럼 넓적한 띠를 돌리고, 중앙에는 2줄의 띠를 돌렸으며 띠에는 8개의 연꽃잎을 가진 꽃송이를 사방에 도드라지게 새겨 장식하였다. 통일신라시대의 직사각형 석조와는 달리 연꽃잎을 장식한 받침기둥 위에 놓인 이 석조는 바깥 면에도 풍만한 연잎과 단아한 띠를 돌려 귀족적인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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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사 삼층석탑 출토 (금동 전각형사리기)( 感恩寺址 東三層石塔 舍利具 )자세히보기
감은사感恩寺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인 682년경 신문왕神文王이 아버지 문무왕文武王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절이다. 지금은 동서 삼층석탑과 건물터만이 남아 있다. 이 사리갖춤은 1996년 동탑을 수리하기 위해 해체했을 때 3층 탑신석 윗면의 사리공에서 발견되었다. 사리갖춤은 부처님의 유골인 사리舍利를 탑 안에 넣을 때 담았던 여러 겹의 용기 세트를 말한다. 감은사 동탑의 사리갖춤은 전각殿閣 모양 사리기를 상자 모양 사리외함 안에 넣어 중첩시켰다. 또한 사리갖춤 앞에 전시된 수정 사리병은 원래 사리기 중앙에 놓은 후 보주와 연꽃잎으로 장식된 복발覆鉢 모양의 뚜껑을 덮어 보이지 않도록 했다. 한편 금도금을 한 사리외함의 네 면에는 안에 넣은 사리기를 지키는 사천왕상 부조가 붙어 있다. 부처님의 세상을 수호하는 임무를 맡은 사천왕은 각 방위를 지키고 있는데, 북방 다문천왕은 손에 탑을 들어 방위를 나타낸다. 갑옷을 입은 사천왕의 모습을 섬세하게 표현한 조각 기법이나 사천왕의 자연스러운 자세 등을 볼 때 당시의 금속공예 기술이 매우 우수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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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쏘기, 《단원 풍속도첩》( 射弓,《檀園風俗圖帖》 )자세히보기
<활쏘기> 역시 인물의 역할과 표정에 따른 심리묘사가 잘 표현되어 있다. 활 쏘는 법을 배우고 있는 장정들과 군관의 얼굴 표정 및 몸놀림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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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법연화경 권5~7( 妙法蓮華經 )자세히보기
왕실에서 펴낸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 일명 법화경)』이다. 천태종의 근본 경전인 『묘법연화경』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유통된 불교 경전으로서, 특히 관음신앙의 근거가 된 제25품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이 대중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이 유물은 1470년(성종 원년)에 세조·예종 등의 명복을 위해 간행할 때 새긴 목판을 이용하여 1488년(성종 19)에 다시 찍은 것으로, 성종의 계비(繼妃)인 정현왕후(貞顯王后)가 순숙공주(順淑公主)의 천도를 위해 간행한 14부 중 하나이다. 왕실에서는 이 때 아미타삼존탱(阿彌陀三尊幀), 시왕탱(十王幀) 등을 보수 또는 조성하는 한편, 법화경(法華經), 참경(懺經), 지장경(地藏經)을 각각 14부(部)씩 인쇄하였던 것이다. 김수온(金守溫)의 발문과 왕실 추복자(追福者) 등의 목록이 있어, 조선 초기 왕실 불교신앙의 일면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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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가 칠년」이 새겨진 금동불입상( 「延嘉七年」 銘 金銅 佛 立像 )자세히보기
경상남도 의령에서 발견되었으며, 현존하는 우리나라 불상 중 가장 오래된 제작 연대를 지닌 불상이다. 불상의 광배(光背) 뒷면에는 47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연가(延嘉) 연간의 일곱 번째 해인 기미(己未)년에 고구려의 수도 평양에 있던 동사(東寺)라는 절에서 만들어 유포한 천불(千佛) 중 하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延嘉七年歲在己未高麗國樂良 東寺主敬第子僧演師徒?人共 造賢劫千佛流布第卄九因現義 佛比丘法穎所供養 연가7년인 기미년(539) 고려국(高麗國: 고구려)의 수도 낙양(樂良: 평양)에 있던 동사(東寺)의 주지스님 경(敬)과 그 제자 승연(僧演)을 비롯한 사도 40인이 함께 현겁천불(賢劫千佛)을 조성하여 유포하기로 하였는데 (이 불상은) 제29불인 인현의불(因現義佛)로 비구 법영(法穎)이 공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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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단원 풍속도첩》( 점심,《檀園風俗圖帖》 )자세히보기
식사중이거나 식사를 마친 일꾼들의 다양한 모습이 매우 자연스럽다. 점심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돌아앉아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아낙이나 따라온 듯한 개 등도 모두 그림에 정취를 더해주는 구실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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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봉림사 터 진경대사탑( 昌原鳳林寺址眞鏡大師塔碑 )자세히보기
고달사 원감대사 현욱의 법을 이어받아 봉림산문을 개창한 진경대사 심희(審希, 855~923)의 탑비이다. 귀부(龜趺)와 이수(?首), 비신(碑身)이 모두 남아 있는 귀중한 예이다. 신라 54대 왕인 경명왕(景明王)이 직접 비문(碑文)을 지었으며, 최치원의 사촌인 최인연이 글씨를 새겼다. 비신 측면에 구름과 용무늬를 새길 정도로 장식이 화려하지만, 귀부의 용머리가 몸에 비례해 지나치게 크고, 표현 수법 역시 과도하게 표출되어 과장된 면이 보인다. 이수는 네모난 방형을 이루고 있는데, 이것은 비신 측면에 구름 · 용무늬를 새기는 수법과 더불어 고려 전기 때 유행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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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총 금제 허리띠(금허리띠)( 金製帶金具 )자세히보기
얇은 금판으로 만든 40매의 허리띠꾸미개와 허리띠고리, 허리띠끝장식으로 구성된 금허리띠외, 이에 달린 17줄의 허리띠드리개로 구성되어 있다. 띠꾸미개는 혁대에 고정되는 사각형판에 심엽형 장식이 달려 있다. 금판 위에 인동무늬를 간략화시킨 세잎무늬를 표현하였으며, 둥근 달개를 금실로 꼬아 매달아 화려함을 강조하였다. 허리띠드리개는 타원형판과 방형판을 교대로 연결하여 만들었는데, 가장 긴 것은 타원형 장식이 10개로 구성되어 있고 끝에는 3개의 방울이 매달려 있다. 나머지 장식 가운데 13줄은 3개의 타원형장식과 5~6개의 방형장식을 연결하여 만들었는데 맨 아래에 곱은옥, 용무늬 맞새김장식, 물고기장식 등이 매달려 있다. 나머지 3줄은 사슬과 속이 빈 금구슬을 사이사이 연결하여 드리웠는데 끝에는 향주머니가 매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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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남대총 북분 금반지( 皇南大塚北墳 金製指環 )자세히보기
신라 지배층의 무덤에서 주인공의 손에 끼워진 채로 혹은 껴묻거리 상자에서 출토된다. 황남대총 북분 출토 반지는 얇은 금판을 둥글게 말아 제작한 것으로 돌아가면서 격자무늬를 새겨 넣은 것이 여러 점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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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태조가 제정한 의례에 관한 책( 洪武禮制 )자세히보기
중국 명(明)나라 태조가 1381년 중국 각지의 유학자들을 불러 모아 편찬한 국가의 예식집(禮式集)을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찍은 것이다. 편찬한 황제의 연호가 "홍무(洪武, 1368~1398)"를 따서『홍무예제』라고 하였다. 고려 말 이후 세종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제정할 때까지 국가적 예법의 기준으로 널리 활용되었다. 조선 전기 예제(禮制)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